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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25회>

사진 제공=교보문고




25. 게으른 출발자

간밤에 비가 왔는지 공기가 축축하다. 똥 마려운 강아지 모양 어제 종일 맴돌던 정자 옆은 눈길도 주지 않고, 아파트 정문 밖으로 나왔다. 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개천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우산까지 챙겨 든 노인들이 몇 보였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었다. 신속함을 잃어버린 노년의 부지런한 걸음은 애잔하고 감동적이었다. 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저마다 다른 꿈틀거림으로 걸었다.

순간, 나는 껑충 한 발을 건너뛰었다. 발아래 뭔가 꿈틀했기에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분홍과 고동색이 뒤섞인 지렁이가 수분이 말라가는 시멘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밟지 않고 반사적으로 피한 것이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결국 다행이지 않을 성싶었다. 아침 해가 점점 올라오는 중이었다. 시멘트 바닥은 점점 뜨거워질 것이다. 지렁이가 왔던 길로 도로 돌아가거나 건너편 흙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몸은 점점 말라붙고 말 것이다.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 지렁이를 흙 쪽으로 던져 주었다.

나는 지렁이처럼 아파트에서 꿈틀대다가 아침 산책을 나왔다. 새벽 5시가 훌쩍 넘었으니 밤을 홀딱 새운 셈이다. 정신은 멀쩡했다. 침대에 든다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외아들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 책 한 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재산을 세상에 기부했다. 재산뿐만 아니라 당신의 신장과 각막 등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른 이에게 기부했다. 관 안에 들어간 아버지는 그러니까 만신창이가 된 시체였다. 입관할 때 본 아버지의 멀쩡한 모습은 교묘하게 보완 물로 꾸민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재산 기부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세상에 다 알려졌다. 생전의 익명 기부도 여기저기서 밝혀졌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위해 비밀리에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전언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이중적인 행위를 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럴 마음조차 먹지 못할 분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진욱을 통해서 은밀하게 유산에 관한 언급이 있었기에 막연하게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부동산이나 현금은 나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못내 궁금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귀한 것을 남기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 평생 사신 분이니 세계를 두루 다니시며 얻은 귀한 것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귀한 자료나 그림 그리고 아버지가 귀하게 여기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밤새 하얀 가죽표지의 책 한 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새벽 산책을 나온 것이다.

아버지가 비밀리에 나에게 유산을 별도로 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남기려고 한 것이 재물이 아니라 책 한 권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진욱이는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가대의 여자를 통해 흰 가죽표지의 책 한 권을 나에게 전했다. 여자가 자신의 출간 책을 홍보하기 위해 장례식장에까지 들고 온 줄 알고, 나는 그 책을 입관실에서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그런데 여자는 그것을 장례식장 식당까지 가져와서 다시 전해주었다. 나와 그 여자 사이에 어머니의 주선이 있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유일한 유산을 전하신 것이다.

어, 나는 다시 발걸음을 멈춰섰다. 산책로에 지렁이가 여기저기 보였다. 시멘트 바닥의 물기는 거의 빠졌고 아침 햇살이 비치자, 말라가는 피부를 어쩌지 못해 힘없이 비틀거렸다. 풀숲으로 다시 던져 주는 것이 돕는 것인지, 반대로 진로를 방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치다가, 나는 혀를 찼다. 자전거 바퀴나 인간의 뒤꿈치가 무심코 눌러버린 지렁이의 머리가 납작하게 시멘트에 말라붙은 상태인데, 끔찍하게도 남은 몸쪽이 파충류답게 아직도 살아남아서 움직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얻은 특이한 증상 중의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지렁이들은 왜 안전한 땅속 거처를 포기하고 길을 떠났을까. 시멘트 산책로를 가로질러서 이쪽 흙에서 저쪽 대지로 건너가는 것이 그들의 최대 모험인 걸까. 인간과 함께 이 산책로를 끝없이 따라가는 것이 수도승 지렁이들의 선택인 것일까. 일부 지렁이들은 왜 일부러 길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일까.

프랑스에서 있을 때는 아침 조깅을 즐기곤 했는데, 프랑스의 잔디밭에는 남자 엄지손가락만한 달팽이들이 눈에 띄었다. 지중해 기후여서 야생 달팽이가 많이 돌아다녔다. 프랑스는 달팽이 요리가 유명한 나리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조깅을 하다가 무심코 풀숲의 달팽이 집을 밟아 까뭉개버렸다. 그 곁에 같이 있던 달팽이가 짝을 잃은 것 같아 미안해서 데려와서 유리병 안에 한동안 키웠다. 재미있는 것은 달팽이에게 당근을 주면 분홍색 똥을 싸고, 오이를 주면 푸른 똥을 쌌다. 달팽이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같은 파충류들에게 대한 정보들을 습득하게 되었다. 달팽이도 지렁이도 자웅동체였다.



자웅동체이지만 그들은 짝을 통해 알을 교환했다. 짝을 찾기 어려울 때 달팽이는 스스로 교배했다. 하지만 지렁이는 암수 동체여도 교배를 통해 알을 교환한다니, 어쩌면 생식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생식 때문이 아니라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을 것이다. 생명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경우가 무엇일까. 목숨을 걸고 목숨을 구해야 하는 도전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지렁이는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산책로의 중간지점에서, 나는 방향을 틀었다. 지렁이도 흙 속에 남아 있는 것들과 떠나는 것들이 있듯이, 인간도 두 종류가 있다. 쉽게 떠나는 인간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인간. 나는 여태 전자에 속했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필요한 절차를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자동차로 갈 곳이 아니라면 비행기나 기차 예약을 번개처럼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옷가지와 여행에 필요한 기본 용품이 들어 있는 여행 가방을 끌고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여행 목적에 맞는 준비 서류나 선물들만 추가하면 되니,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서류가 미비하면 비행기 안에서 하면 되었다. 필요한 선물은 집에 마련되어 있는 몇 개를 집어넣으면 되고, 그래도 부족하면 비행기 안에서 사고, 아니면 공항의 면세점 안에서 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떠나던 여행자가 이번에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여섯 시가 다가오자, 아침 산책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적거리는 사람을 나는 게으른 출발자라고 불렀다. 떠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웠다. 특히 연인들이 그랬다.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인연인 줄 알면서 질질 끌며 버티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게으른 이별은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반면에 쉽게 떠나는 자들은 결단력 있는 이별을 선택했다. 그래야 새로운 출발에서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나는 게으른 출발자에 합류한 셈이다. 이전이라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정자 옆에서 본 얼굴도 모르는 여인 때문만도 아니었다. 정말 여자가 그리우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나길 원하는 여자들의 문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다. 그러므로 특정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과녁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과녁을 잘못 알고 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 이전에 나는 삶의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나 선한 인간이라도 인간의 삶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어디로 출발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말 나의 과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렁이처럼 무턱대고 떠날 수 없어서 게으른 출발자가 된 것이다. 자칫 잘못 나갔다가는 시멘트 바닥에서 온몸으로 부대끼며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말라갈 것이다. 어이쿠, 나는 순간 발길을 멈추었다. 지렁이 한 마리가 온몸이 상처와 흙투성이로 범벅이 되어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원은 내가 참 빛을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소원이나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진리를 찾아 한 번은 떠나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참 빛을 찾아 떠나야 하지만, 그 빛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참 빛은 하늘의 태양 빛도 아니다. 참 빛은 ‘길’이라고 하는데 내가 밟고 있는 시멘트나 흙 땅에 난 길도 아니다. 또한, 참 빛은 ‘생명’이라는데, 사람의 목숨도 아니다. 참 빛은 길이자 생명이라는데, 그 빛은 어디에 있고, 그 길은 어디에 있으며, 그 생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렁이는 무엇을 찾아 떠났을까. 빛을 찾아 떠났다가 빛에 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길을 찾아 떠났다가 길 위에서 바짝 말라가고 있는 것일까. 생명을 찾아 떠났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게으른 출발자가 된 것은 지렁이 같은 결과를 예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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