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희 일억 주라고 왜 안 줘”ㅡ영화 ‘시민덕희’ 네이버 관람평 중 1000개 이상의 추천을 받은 코멘트
2025년 4월, 시민 덕희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다룬 영화 ‘시민덕희’의 실제 주인공 김성자(51)씨는 2016년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은 후 조직 총책을 잡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총책이 잡힌 지 9년이 지났지만 김씨는 아직까지도 신고 포상금 1억원은커녕 피해 원금 3200만원도 받지 못했다. 사건에서 완전히 배제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검찰로부터 ‘범죄피해재산 환부’가 불가하다는 통지를 받은 김씨 측은 7일 환급 거부 처분에 대한 취소 소송 소장을 수원지방법원에 접수했다. 범죄피해재산 환부는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 제6조에 따라 범죄수익을 몰수·추징해 피해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제도다. 앞서 수원지검은 김씨의 범죄피해재산 환부청구가 불가하다고 통지했다. 2016년 보이스피싱 사건과 관련해 법원이 총책으로부터 몰수한 범죄피해재산을 피해자인 김씨에게 돌려줄 수 없다는 얘기다.
검찰은 “신청인(김씨)은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 제6조 제3항·1항에 따라 환부를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2016년 사건의 몰수 선고는 형법 제48조 제1항에 근거한 것으로, 부패재산몰수법에서 정한 피해자 환부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본건은 신청 이유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김씨는 “사건 당시 공로자나 제보자로 선정됐으면 환부됐을텐데 피해자 70명 중 1명으로만 남아서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정적 제보한 김씨, 10년째 ‘빈 손’인 이유
2016년 보이스피싱에 당해 3200만원을 잃은 김씨는 중간 조직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일당 검거를 위한 핵심 증거들을 입수했다. 총책 신원, 조직원이 쓴 자필 진술서, 피해자 명단, 중국 범행 근거지 정보 등을 확보해 경찰에 전달했으나, 경찰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김씨는 총책이 설을 맞아 귀국한다는 사실과 항공편 정보까지 전달했고, 경찰은 이 정보를 토대로 총책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총책 검거 사실조차 김씨에게 알리지 않았다. 언론에도 “첩보를 입수해 검거했다”고만 밝혔다. 김씨는 “피해자 70명 중 한 명으로만 남았다”며 “경찰이 공을 가로챘다”고 토로했다. 김씨가 경찰로부터 들은 말은 “아줌마, 그냥 100만원 받으세요”가 전부였다. 김씨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사건에서 배제된 김씨는 참고인 조사도 받지 못했으며, 총책 재판 과정에서도 형사 소송 절차 등을 안내받지 못해 권리 구제 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에서야 범죄피해재산 환부를 수원지검에 신청했으나 돌아온 건 환부 불가 통지서였다. 법원이 총책으로부터 몰수한 1억 8000만원(추정 금액) 중 김씨 몫은 ‘0원’이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돌려받는 선례를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김씨는 포기하지 않고 검찰의 환급 거부 처분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에 들어갔다. 지난해 영화 개봉 이후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로부터 '공익신고자’로 인정받고 포상금 5000만원을 받은 김씨는 이 중 상당 금액을 변호사 선임비에 썼다.
남는 게 없어도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 희망이다. 그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나로 인해 희망을 얻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포기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나 주위에서 그렇게 말해주는 건 사랑이라면 사랑이거든요. 보답하려면 제가 희생해서 희망적인 판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반드시.”
보이스피싱 범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8545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피해건수는 2만839건으로 전년(1만8902건)에 비해 10% 증가했다.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는 2019년 이후 매년 감소세를 보였는데 지난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작년 기준 1인당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전년 대비 75%(1734만원) 증가한 4100만원이다. 피해액이 1억원이 넘는 피해자는 1793명에 달했다.
경찰 관계자는 “2024년 보이스피싱 범죄는 전년 대비 ‘기관사칭형’ 범죄가 다소 줄어든 반면 대출수요 증가를 이용한 ‘대출빙자형’ 범죄가 크게 늘어나면서 피해 발생 증가의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카드배송원을 사칭,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처럼 속여 금전을 갈취하는 등 범행 수법도 고도화되고 있다.
‘경제적 살인’이라고 불리는 보이스피싱은 피해자들을 자책감에 빠지게 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김씨는 “사기 범죄 형량 강화는 물론,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치유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준배 경찰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사기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이 빈약하다"며 “우선적으로 저소득층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상담서비스가 강화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 교수는 “'사기 당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등 피해자를 탓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도 처음엔 자책감에 사로잡혀 피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영화가 나오기 전 늘 움츠려 있었다는 그는 지난해 ‘시민덕희’ 개봉 이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서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고. 피해를 입으면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게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김씨는 전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목숨을 구할 수 있더라고요.” 많은 국민들로부터 응원을 받은 김씨의 깨달음이다.
작년 8월 권익위로부터 포상금을 받은 김씨는 “계란으로 바위가 안 깨질 줄 알았는데 깨지더라”면서 “경찰이 인정하지 않은 공을 나라에서 인정해줬다”고 말했다. 김씨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면서 기관이나 은행권 등으로부터 강의 제안도 받았다고. 그에게 석상에 선다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처럼, 덕희처럼 보이스피싱은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는 범죄지만 자책하지 말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단 한 명의 피해자라도 있는 한 저는 평생 함께 싸울 거예요.” 희망을 등에 업은 김씨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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