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이는 밝고 건강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의 귀가가 늦어지고 가끔 외박을 하는 일도 생겼다. 우연히 아빠의 휴대폰을 보게 됐고 소셜미디어(SNS)에서 ‘XXX’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여성과의 대화를 발견했다. 그 대화방에는 부적절한 사진과 함께 호텔에서 만났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빠의 외도를 알게 된 아린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면 부모님이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빠의 늦은 귀가와 외박은 계속됐고 SNS를 확인할 때마다 그 여성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아린이는 더 이상 이 상황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후 집안은 걷잡을 수 없는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 속에서 아린이는 마치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학원에서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머릿속에는 아빠와 그 여성의 대화 내용과 사진들이 맴돌았다.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잠이 들어도 자주 깨어 불안감에 시달렸다. 아린이의 부모는 딸의 혼란과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까?
청소년기는 신체적 변화가 급격히 이뤄지고 전두엽 발달이 미성숙해 사고와 감정 조절이 불완전한 시기다. 특히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중요한 발달 단계라 이 시기의 경험은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외도에 따르는 배신감, 혼란감, 불안감 등의 정서적 충격은 전전두엽 피질 발달에 영향을 미쳐 장기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부모의 외도를 경험한 아이들은 성인이 됐을 때 그런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 비해 외도를 할 확률이 높다. 결혼 후에도 배우자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고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부모의 외도가 대인관계에서 신뢰감, 도덕성, 성적 가치관 형성 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모의 외도가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외도로 인한 부모 간의 갈등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자녀에게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초래하고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HPA) 축을 활성화시켜 해마와 편도체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는 감정 조절의 어려움, 기분 장애 등 정신 건강에 대한 취약성이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외도가 밝혀진 후 부모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자녀와 어떻게 소통하는지가 자녀의 심리적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들의 미래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아린이 부모를 위한 첫 번째 지침은 자녀와 조용한 환경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다. 외도를 한 부모는 자신의 행동이 자녀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정서적 충격을 준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둘째, 자녀가 느끼는 불안, 두려움, 분노, 상처, 실망 등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부모의 외도를 접한 자녀의 감정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경청해야 한다. 셋째, 부모의 갈등이 깊어지더라도 자녀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가 현재의 힘든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대신 기존 생활을 유지하며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넷째, 자녀를 부부갈등으로부터 보호하고 부모로서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녀를 절대로 갈등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외도 사실이 자녀에 의해 밝혀졌더라도 부모 간 갈등의 원인이 자녀의 탓이 아님을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자칫 자녀가 부적절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녀의 심리 상태를 평가하고 비약물적 혹은 약물적 치료를 병행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부모 교육을 통해 보다 건강한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부모가 실수를 했더라도 성숙하게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녀는 점차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 외도로 인한 충격도 완화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태도와 대처 방식이 자녀의 회복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