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40) 작가의 개인전 ‘으웩! 음식에서 머리카락!’을 찾은 관람객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거대한 새틴 리본이 달린 머리망이다. 전시장 입구 외벽 유리창에 설치된 이 검정색 머리망은 한국의 여성이자 한때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서비스직 노동자로 종사했던 작가에게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치다. 전시 개막을 앞둔 9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지 않게 머리를 꽁꽁 감싸고 나면 개인의 이미지(존재)는 지워지고 한 명의 노동자가 탄생한다”며 “소비자들도 머리망을 쓴 사람에게는 ‘내가 서비스나 사과를 요구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바로 이 머리망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머리망에 대한 분노는 전시장 두 개 내벽에 걸친 연작 회화 ‘유주얼 서스펙트(2025)’로 이어진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쓰는 감자튀김 포장지에 연필로 힘주어 그린 작품 속 여성들은 머리망과 마스크 혹은 모자까지 착용했지만 땀 흘려 열심히 일하다 보니 꽁꽁 동여맨 머리가 어느새 산발이 된 모습이다. 결코 아름답다고 하기는 어려운데 심지어 잔뜩 화도 나 있다. 손님들의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온 것이다. 머리카락을 빠뜨린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마스크·머리망·모자로 멸균돼 누가 누군지 구분도 어려워진 여성 노동자들은 동료에 대한 의심을 감추지 못한 채 치뜬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작가는 “실제로 머리카락의 범인을 물색하는 경험을 자주 했는데, 모두가 내 머리카락은 아니라고 경계하면서도 누가 떨어뜨린 건지 서로 의심하는 모습이 현실적이면서도 슬펐다”며 “또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털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긴장하는 분위기에 동명의 영화 제목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면 소동이 벌어지는데 소비자들은 일하는 노동자들이 떨어뜨린 그 머리카락을 마치 벌레보다 더 징그럽고 역겹게 느낀다는 생각을 했다”며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깨끗해질 수 없고 털 하나 없이 멸균될 수는 없는 존재인데, 그런 인간 노동자의 흔적을 왜 이렇게 혐오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기존 작업의 연장선인 ‘종이 조각’도 자리했다. ‘찬미’와 ‘민정’이라는 이름의 여성 조각은 기름에 절여진 감자튀김 봉지를 최소 10겹 이상 붙인 뒤 연필로 스케치해 완성됐다. 작가는 소재에 대해 “한창 일할 때 감자튀김 기름이 찌든 포장지가 땀 흘려 일하는 누군가의 살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또 “종이와 연필은 쉽게 빛 바래고 상하기 쉬운 약한 소재라는 인식이 있지만 계속 덧붙여가면 생각보다 더 단단해지고 잘 삭지도 않는 생명력이 있는 소재”라며 “사실 고급 종이를 한번 써보기도 했는데 왠지 기가 죽어서 작업이 잘 안되더라”며 웃었다.
작가는 종이 조각을 두고 “정념이 깃든 일종의 토템(상징성이 있는 물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뜻이 좋고 예쁜 이름을 지어두고 소원을 빌듯이 종이를 한 겹씩 붙여나간다. 한 번씩 뽀뽀도 해주고 기도도 하면서. 종교인들이 묵주나 염주를 돌리며 기도문을 반복하는 그런 행위가 나의 작업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동자들의 분노와 부당한 감정, 슬픔 등이 해소되기를 바라는 나의 염원은 이 문제를 시각화했을 때 가장 잘 전달되고 파장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며 “앞으로도 작가로서 말할 수 있는 문제들을 계속 찾아 비틀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꽈배기처럼 비틀어보겠다”고 자신했다.
한편 12일부터 서울 이태원동 P21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은 지난달 26~30일 홍콩에서 열린 글로벌 미술 장터 ‘2025 아트바젤 홍콩’에서 먼저 소개돼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작가는 아트바젤 홍콩이 신진 작가 지원을 위해 올해 처음 신설한 ‘MGM 디스커버리즈 아트 어워즈’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수상에 대해 “한국인뿐 아니라 타국의 사람들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맥락과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해줘서 굉장히 기뻤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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