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엔비디아의 범용 인공지능(AI) 칩 중국 수출까지 제한했다. 미국은 뉴욕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퇴출도 논의하는 등 보복 카드를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지만 중국이 더 많은 패를 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급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공은 중국에 있다”며 연일 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15일(현지 시간) 엔비디아는 이달 9일 미국 정부로부터 H20 반도체의 중국 수출 시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14일에는 정부로부터 이 규제가 무기한 적용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미 정부는 “H20 칩이 중국의 슈퍼컴퓨터에 사용되거나 전용될 수 있다”고 정책 배경을 설명했다. H20 칩은 중급 AI 가속기(AI 연산에 특화한 반도체)로, 그나마 중국에 합법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가장 앞선 제품이었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사용한 칩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엔비디아는 이번 규제로 회계연도 1분기(2~4월)에 55억 달러(약 7조 8567억 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재고, 구매 약정, 관련 충당금 등에 따른 비용이다. 뉴욕 증시 시간외거래에서 엔비디아 주가는 6.3%나 하락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조치는 중국의 AI 굴기를 저지하는 정책 흐름에 더해 자국의 관세 부과에 맞대응하는 중국에 보복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엔비디아는 전날 미국에서 슈퍼컴퓨터를 생산하는 등 4년간 파트너사들과 최대 5000억 달러(약 714조 원) 규모의 AI 인프라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음에도 H20 칩 수출제한 조치를 적용받게 됐다. 이달 9일 미 공영방송 NPR은 소식통을 인용해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마러라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찬을 갖고 미국 내 투자를 약속한 뒤 H20 수출제한 조치 철회를 받아냈다고 보도한 바 있지만 실제로는 H20 규제가 시행된 셈이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와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뉴욕 증시에서 중국 기업을 퇴출시키는 방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져 미중 간 보복의 악순환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최근 중국 기업 증시 퇴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데 이어 릭 스콧 상원의원(공화·플로리다)이 폴 앳킨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지명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3월 7일 기준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은 286개, 시가총액은 1조 1000억 달러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경제 무대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향후 진행될 70여개국과의 상호관세 협상에서 관세를 낮춰주는 대가로 중국과 거래를 끊도록 압박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희토류와 가공 처리된 핵심 광물 및 파생 제품 수입에 대한 국가 안보 영향을 조사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최근 중국 정부가 자동차와 드론·로봇에까지 필수인 희토류와 자석의 수출을 전격 중단하자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해 여러 대응 카드를 빼들고는 있지만 중국이 가진 패가 더 많다는 평가가 나온다. 애덤 포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최근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미국은 중국에서 필수품을 수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빠른 시일 내 이 제품들을 대체하기는 어렵다”며 “중국이 관세전쟁에서 우세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무역전쟁의 포문을 연 미국이 외려 중국에 협상을 종용하는 촌극도 연출되고 있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트럼프 대통령이 전해준 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은 중국 쪽 코트에 있다. 중국은 우리와 협상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 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며 “중국은 우리가 가진 것, 즉 미국 소비자를 원한다”고 말했다. 레빗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협상에 열려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중국은 미국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핵심 지지층이자 관세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농부들에게 “버티면 보상이 있을 ”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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