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의 첫 무역 협상이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당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빨리 나올수록 유리하다고 강조한 것과 달리 이날 회담은 미국 측이 EU에 확실한 협상안을 제시하지 못하며 헛바퀴를 돈 것으로 전해졌다.
15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행정부와 EU가 전날 무역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2시간여간 회동했으나 진전이 거의 없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무역정책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힌 EU와 달리 미국 측의 요구 사항이 모호해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EU 집행위원회의 마로시 셰프초비치 무역 담당 부위원장은 27개 EU 회원국을 대표해 미국 워싱턴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14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셰프초비치 부위원장은 회담이 끝난 직후 자신의 X(옛 트위터)를 통해 “상호 무관세뿐 아니라 비관세 장벽에 관해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재확인하면서도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상당한 공통된 노력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올로프 길 EU 무역담당 대변인도 협상 시한이 90일임을 상기하면서 “EU는 해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제는 미국이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협상이 그렇듯 양측 모두가 무언가를 협상 테이블에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서 글로벌 무역 체제 재편과 제조업 일자리 창출을 내세워 약 4310억 달러(약 580조 원) 규모의 EU 상품에 광범위한 관세를 부과했다. 다만 EU의 요청에 따라 상호관세를 20%에서 10%로 낮추고 90일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EU는 협상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90일 후 미국 상품 약 210억 유로(약 30조 원)에 맞대응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EU 측은 미국에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산업재에 ‘제로 투 제로(상호 무관세)’ 정책을 적용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무역 상대국도 관세를 제로로 결정하는 방안이다. 일부 영역에 대해서는 비관세 장벽도 협상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반면 미국 측은 무관세 제안을 거부하며 상호관세 20%를 비롯해 자동차와 금속 등 주요 산업을 겨냥한 관세 대부분이 유지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아울러 유럽 화학 회사들이 미국 제약 산업에 사용되는 전구체를 더 많이 생산하고, 공급망을 통합하고, 미국으로부터 다시 수입하는 의약품 가격 인상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관계자들에게 반도체와 의약품 수입에 대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관련 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16일부터 본격 시작되는 일본과의 협상도 ‘밀고 당기며’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협상단장이자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최측근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출국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관세 장벽이나 환율, 알래스카 LNG 등에 미국이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우선 (미국의) 구체적인 요구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일본의 협상 카드를 먼저 꺼내기보다는 미국 측 요구 사항을 최대한 듣고 대응 방향과 양보 수준을 협의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SMBC닛코증권의 수석 전략가 오타 치히로는 “일본의 무역 협상이 잘 진행된다면 추후 다른 나라들의 협상에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은 다음 주께 미국과 무역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한편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이날 상호관세 유예기간인 90일 내에 15개 주요 무역 상대국과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밝히며 미국이 협상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베선트 장관은 야후파이낸스 인터뷰에서 “중국을 제외한 14개국과의 협상에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명확성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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