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불과 2년 뒤인 2027년은 유럽연합(EU)이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를 퇴출하겠다고 약속한 시점입니다.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그동안 의존해 온 러시아 가스와 결별에 나선 것인데요. EU는 이르면 다음 달 그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놓겠다는 계획입니다. 가스를 둘러싼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는 에너지 지정학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변수죠. 무엇보다 현 시점에서 EU의 러시아 가스 중단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문제가 당장 다음주로 닥친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상호관세 협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 미국과 유럽, 러시아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푸틴한테 벗어나려니
“노르트스트림은 푸틴이 천연가스를 내세워 유럽을 인질로 삼으려고 심어둔 덫의 핵심이다”
프랑스 언론인 마리옹 반 렌테르겜이 쓴 책 ‘노르트스트림의 덫’은 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잇는 4개의 가스관 노르트스트림 1과 2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유럽 대륙을 어떻게 가스로 ‘종속’시켰는지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EU는 러시아의 의도를 알고도 ‘대안으로 삼을 에너지가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 가스의 침투를 용인한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요. ‘노르트스트림의 덫’에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재임 시절 노르트스트림 2 건설을 만류하는 한 EU 지도자에 “이 프로젝트는 악마와 같다”고 시인했다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의존성이 높은 계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메르켈 전 총리의 고백이 가지는 의미는 숫자로 확인됩니다. 영국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에 따르면 지난해 EU의 러시아 가스 수입은 18%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가스의 퇴출을 선언 하 뒤 ‘출구 전략’을 수립하고 있음에도 말이죠. 물론 EU도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하고 가스 수요를 억제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지난해 EU의 가스 수요가 11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러시아산 가스 수입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지금까지 계속돼 온 의존도를 한 번에 낮추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트럼프가 기다린다
EU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이 참에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려는 것이 바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부터 EU가 러시아의 가스에 의존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고 하죠. 1기 시절인 2021년 1월, 퇴임을 불과 하루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노르트스트림 2 건설 사업에 관여한 러시아 기업에 제재를 가하며 일종의 훼방을 놓은 것이 한 사례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EU에서 러시아 가스 대신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을 더 많이 팔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EU의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미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EU로서도 미 LNG 수입 확대는 협상 카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EU의 가스 의존이라는 약점을 다 알고 있는 미국을 상대로 LNG를 더 많이 수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할 수 있죠. 트럼프 대통령도 이달 ‘미국산 공산품에 관세를 매기지 않겠다’는 EU의 제안에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EU에서 미국이 보는 무역적자 3500억 달러 만큼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라”며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500조 원에 가까운 막대한 규모입니다. 정말 그만큼을 사들이는 말이라기 보다는 ‘미국 LNG를 많이 수입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EU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 미국 LNG 수입을 이미 큰 폭으로 늘렸죠.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미국 LNG 수출의 70%를 EU가 차지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보다 수입을 더 늘리라고 압박하는 것입니다.
EU로서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계속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간 밀착도 큰 변수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노르트스트림 2 가스관의 재가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요.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의 전략을 일부 수정해 러시아와 공동으로 유럽 가스 시장을 좌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EU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원회는 러시아 가스 퇴출 로드맵을 4월에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내달로 시점을 미뤘습니다. EU 집행위 측은 로드맵 발표 연기의 이유로 "최근의 '지정학적 전개'에 따라 시기가 바뀌었다"는 점을 들었다고 폴리티코가 전했습니다. 최근에는 EU 집행위가 오는 6월 발표할 대(對) 러시아 제재안에서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빼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칫 러시아 가스로부터의 ‘해방’도 스텝이 꼬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LNG, 얼마나 사야 하나
미국과 협상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EU의 고민이 남의 고민만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과 EU는 서로 처한 상황이 다릅니다. 한국은 미 LNG를 사들여 수입선을 다변화하면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죠. 관건은 수입 규모일 것입니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층인 에너지 업계를 달래야 할 필요성이 큽니다. 관세발(發) 경기침체 우려로 국제유가가 하락세를 보이면서 미국의 석유·가스 기업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기조인 증산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죠. 미국이 요구하는 LNG 구매 규모가 예상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기사 하단에 있는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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