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채용을 하면 지원자 중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이 거의 없어요. 출신 학교의 등급으로 채용을 결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과거와 분위기가 달라져 채용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 대전의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과학계 인재 유출의 현실을 이렇게 전했다. 이 기관은 국가 중대 과제를 맡고 있는 곳이지만 올해 초 필요한 신규 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지원자들의 학위 논문 수준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며 “우수 인재들이 국가 과학 기관을 외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단 신규 채용만 문제는 아니다. 출연연 연구원들이 창업하거나 교수직 제안을 받아 자리를 옮기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전공과 무관한 민간기업으로 이직하는 사례까지 늘고 있다. 4대 과학기술원에서도 교수진의 이탈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최근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33명의 교원을 신규 채용 중이다. 개교 이래 최대 규모다. 지난 5년간 60여 명의 교원이 자리를 옮긴 탓이다.
출연연과 과기원은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요람이다. 기관의 소재지가 지방에 있음에도 우수한 인재들이 이곳에서 일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그만큼 사명감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기관 관계자들은 “그 사명감을 유지하기에 지금의 처우는 너무 열악하다”고 입을 모은다. 올 3월 정부가 출연연 운영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고 인건비를 포함한 예산을 보다 유연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대책을 내놓은 것은 다행이지만 낡은 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고 나서는 기관은 없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4대 과기원 혁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언급했으나 이마저도 1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돈이 성과 아니겠느냐’고 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올해 들어 정부는 인공지능(AI), 우주산업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파격적인 규모의 인재를 유치하겠다며 연일 정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를 끌어오겠다’는 선언만 가득할 뿐 ‘어떻게 인재를 유치하겠다’는 방법론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애써 초빙한 인재들이 수도권 바깥에 위치한 학교나 연구 기관을 선택할 이유가 많지 않아 보인다.
21일은 58회 ‘과학의 날’이다. 정부는 1968년 과학기술인의 연구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과학기술처’를 신설하며 과학도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60여 년이 흐른 현재 전 세계가 과학 인재를 육성해 미래 먹거리 산업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된 상황에서 산업의 근간이 될 기초연구를 진행하는 과학도들은 지금도 이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과학 인재들이 의대나 대기업이 아닌 연구소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만한 파격적인 대안이 시급한 이유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