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를 배려하는 승자의 모습에는 품격이 느껴진다. 특히 전장의 상황이 치열할수록 승리자의 아량과 관대함은 더욱 빛이 난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패배한 진영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승리자의 인도주의적 행위를 주제로 한 매우 독특한 전쟁 역사화 한 점을 제작했다. 1635년에 완성된 이 그림의 제목은 ‘브레다의 항복’인데 ‘창’이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 당시 브라반트 지역의 브레다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다룬 역사화다. 스페인 군주 필리페 4세 휘하의 유능한 지휘관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브레다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곳을 4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다. 식량이 바닥난 네덜란드 저항군의 수장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는 결국 항복할 것을 결정하며 한 가지 조건을 스페인 측에 제시했다. 패전군이 무기와 대열을 유지한 채 요새에서 철수하는 것을 허용해달라는 명예로운 퇴진에 관한 요청이었다. 스피놀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625년 6월 5일 브레다의 네덜란드 군은 공식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양측의 수장인 스피놀라와 나사우가 직접 만나 요새의 열쇄를 평화적으로 양도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벨라스케스는 바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평원을 배경으로 화면 전반에는 양측 군인들이 도열해 있다. 좌측이 패전한 네덜란드 병사들이고 우측에 창을 꼿꼿이 세우고 군집해 있는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 군대다. 이들 앞에는 상체를 숙이며 정중하게 요새의 열쇠를 건네는 네덜란드 지휘관과 패장을 위로하는 겸손한 자세의 스페인 군의 수장 스피놀라가 등장한다. 벨라스케스는 두 주인공의 자세와 표정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인 배려와 관용의 가치를 시각화하려 했다.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던 두 지도자의 현명함과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화가의 의도였다.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올곧이 전달하기 위해 정교하고 사실적인 표현 기법이 사용된 이 작품은 기록과 상징이 절묘하게 결합된 매우 독창적인 전쟁 역사화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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