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교황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많은 이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 가톨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지 진보적 성향으로 여겨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라 규정하지 않았지만 기존 교회 질서에 도전했고 1200년 만에 등장한 비유럽 출신 교황으로서 교회의 중심을 바꿔놓았다.
21일(현지 시간) 향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본주의·빈곤·환경 같은 주제에 대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냈다. 미국 빌라노바대의 교회사학자 마시모 파조리올리는 “그는 말이나 상징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가톨릭의 세계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그는 기후변화 대응이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전 인류의 책임임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 평화를 지키는 사람, 창조 세계를 아끼는 사람과 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적도 없다. 그는 교황궁을 거부하고 소박한 생활을 택했으며 바티칸 직원들도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에서 겸손과 단순함을 추구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거리로 나가 멍들고, 다치고, 때 묻은 교회’였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그의 이상이었다.
노트르담대 역사학자 존 맥그리비는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요새가 아니라 ‘야전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동성애자와 성소수자를 포용하려는 그의 태도는 이전 교황들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둘러싼 문화 전쟁에 뛰어들기보다 사회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길을 택했다. 1960년대 교회를 현대화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되살린 인물로 진보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꾸짖었고 돈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 낙수 효과 이론에 대해서는 “권력자들의 선의와 지금의 체제가 잘 작동한다는 믿음에 기댄,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황청에 순응하던 보수 성직자들조차 그를 공개 비판했다. 일부는 ‘이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교황직 후반부에는 미국 보수 진영과 계속 충돌했다. 2월 10일 미국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J D 밴스 부통령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규모 추방 정책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대로 형성된 양심이라면 불법 체류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어떤 정책에도 분명히 반대 입장을 보여야 합니다.”
그는 낙태 반대 입장을 고수했지만 교회의 관심이 특정 이슈에만 머무는 것을 경계했다. 재임 초부터 “낙태, 동성 결혼, 피임 문제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것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낙태에 찬성하는 정치인에게 성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도 논란이 됐다. “성체는 죄인에게 필요한 빵이지 성인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라고 밝힌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조차 때때로 실망했다. 남반구 출신 지도자들처럼 그는 다소 늦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했다. 여성의 교회 참여를 확대하는 데도 조심스러웠고, 성 학대 문제 대응도 초기에는 미흡했다. 그럼에도 그의 교황직을 단지 논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진짜 변화는 교회의 중심축을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로 옮겼다는 점이다. 그는 추기경단의 지역과 철학적 균형을 바꿨고 차기 교황 선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인사들을 다수 임명했다. 앞으로 열릴 콘클라베에서 그의 방향성을 계승할 수 있을지가 남은 과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을 제도와 권력을 상징하는 자리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 중심주의와 세속적 권위를 경계하며 교회를 다시 ‘사람’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영적 반항아’ 혹은 ‘유쾌한 문제아’였던 그는 늘 경계 밖으로 교회를 밀어냈다. 그는 ‘복음의 기쁨’을 이야기하며 교회 권력자들의 말뿐인 비관주의와 ‘장례식장 같은 얼굴’을 꼬집었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존 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왜 특별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세상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봤고 교회를 바깥에서 안으로 들여다봤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게 바로 그가 걸었던 교황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런 교황을 또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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