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을 끝내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다. 조급한 심경이 엿보이지만 미국과 유럽·우크라이나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향한 협상이 가시권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아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영토 양보와 평화라는 기본 구도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안보 보장 방식도 절충점을 모색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추진하겠다는 헌법 조항은 유지하지만 실제 가입은 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가 전후 강력한 안보 보장을 받을 권리를 인정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러시아가 요구했던 ‘중립화’나 ‘비무장화’ 조항은 이번 협상안에 없다. 사실상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뒷받침하게 되는 셈이다.
관건은 미국이 얼마나 명확하게 휴전과 전후 안보를 보장할 것인가다. 유럽은 미국이 지속적으로 정보를 지원해 러시아의 추가 공격을 사전에 감지하는 역할을 맡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러시아가 다시 침공할 경우 유럽군이 개입할 수 있도록 미국이 확실한 지원을 약속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평화안은 전형적인 외교 문서처럼 모호한 표현을 담고 있다. 각국이 국내 여론을 의식해 저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호성이 러시아를 서방에 대한 지속적 위협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전략적 현실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군과 유럽 지도부는 러시아를 여전히 명백한 적으로 보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를 ‘경제적 기회’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
크리스토퍼 카볼리 나토 최고사령관은 3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동맹, 그리고 세계 안보에 지속적인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79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매달 3만 명씩 병력을 충원하고 있으며 현재 전선 병력은 2022년 침공 초기 대비 두 배인 60만 명을 넘겼다고 밝혔다. 또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이 매달 25만 발에 달해 미국과 유럽을 합친 물량의 세 배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협상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도 있다. 첫째, 협상 주체가 이원화돼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측은 러시아를 설득하는 데 집중하고, 유럽 측은 우크라이나를 달래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가 훨씬 더 많은 양보를 했다는 점이다. 유럽 관계자들은 이번 주 협상에서 “러시아가 더 유연해지지 않으면 우크라이나가 협상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둘째, 협상 진행 상황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된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24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겨냥해 “우리는 평화협정에 매우 근접했지만 카드가 없는 젤렌스키가 이제 일을 끝내야 한다”고 압박했다. 트럼프는 다음 날 러시아를 향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야간 공습한 직후 그는 “불필요하고 시점도 최악이었다. 블라디미르, 멈춰라”라고 경고했다.
셋째, 협상 방식이 기존 외교 관례를 깨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외교 협상은 수 주간 준비를 거치지만 이번에는 사전 조율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있다. 미 당국자들에 따르면 트럼프 측이 마련한 협상안은 상세 계획서라기보다는 개요 수준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우선 휴전부터 이끌어내고 세부 사항은 이후 조율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까지 “합의가 안 되면 협상장을 박차고 나올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던 트럼프가 이번 주 들어 우크라이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관세정책 실패로 타격을 입은 트럼프에게는 조속한 외교적 성과가 절실한 상황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유럽이 전후 우크라이나 안보를 주도하는 가운데 미국도 일정 부분 직접 개입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부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운영을 미국이 맡아 전후 전력 공급을 책임진다. 또 우크라이나의 광물 자원 수익 일부를 미국이 공유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통해 전후 질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강화하려는 셈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가을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과의 TV 토론에서도 “협상으로 전쟁을 멈추고 수많은 생명을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끔찍한 유혈 사태를 끝내고 싶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그의 휴전 의지가 얼마나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안보 보장과 연결될 수 있느냐다. 아직 갈 길은 남아 있지만 트럼프는 한 걸음씩 목표에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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