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교황 레오 14세는 8일(현지 시간)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 시작 이틀째, 네 번째 투표에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가톨릭 수장)’로 추대됐다. 총 다섯 번의 투표를 거쳐 선출된 고(故)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더 빠르게 총의를 얻은 셈이다.
유력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고 강대국 출신 교황을 꺼리는 가톨릭에서 미국인 교황의 탄생은 이변이다. 레오 14세가 변방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평생 사목해온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레오 14세는 1955년 시카고에서 교육자인 프랑스·이탈리아계 아버지와 도서관 사서인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제 교육을 받은 뒤 1985년 선교단의 일원으로 페루로 갔다. 그는 빈촌과 오지를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아우구스티노회 시카고 관장으로 선출돼 1999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왔지만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빈민가와 농촌이 많은 페루 치클라요 교구의 주교로 임명됐고 이듬해 페루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식량과 모포 등을 실은 흰색 픽업트럭을 손수 몰며 안데스산맥 오지를 자주 찾았다. 픽업트럭이 고장 나면 직접 고쳐가며 빈촌을 누빌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불편한 잠자리와 소박한 음식을 마다하지 않는 소탈한 모습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점에서 ‘(페루) 북부의 성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가장 미국인답지 않은 미국인’ ‘두 번째 남미 출신 교황’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레오 14세는 전임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기조를 계승하지만 균형을 중시하는 중도파라는 게 중론이다.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의 핵심 부서인 주교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때 주교 선발 과정에 여성 3명을 최초로 참여시키는 개혁 조치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122년 만에 교황명으로 선택한 ‘레오’ 역시 개혁성을 상징한다. 레오 13세는 획기적 회칙인 ‘레룸 노바룸’을 통해 공정한 임금과 인간적인 노동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명은 동시에 인공지능(AI) 시대 인간 노동과 삶의 방식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이민자와 기후변화 이슈에서는 전임자의 진보적 기조를 계승할 공산이 크다. 그는 올해 2월 미국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민자들을 보호하는 여러분의 일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회의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민을 적법하게 규제한다고 해서 사람의 본질적 존엄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한 세미나에서는 성경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들이) 온갖 것(자연)을 다스리게 하자’는 하느님의 명령은 자연을 폭압적으로 다스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상호성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소수자 문제에는 보수적인 입장을 나타내왔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이던 2012년 동성 커플에 대해 언론과 대중문화가 “복음에 어긋나는 신념과 관행에 호의적”인 점이 실망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레오 14세가 선출 직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나치게 화려하다며 착용하지 않았던 진홍색 모제타(어깨 망토)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한 점 역시 그의 성향을 드러내는 사례로 꼽힌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미셸 팔콘 신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품위 있는 중도파”라며 “무엇이든 과하지 않다”고 말했다.
레오14세는 진보·중도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양 진영에서 균형을 잡으며 온건한 중도 개혁 행보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레오 14세가 동료들로부터 파벌 간 중재에 능한 ‘유쾌한 중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전했다. 페루에서 사목하던 시절 좌파 해방신학 지지자들과 정통 가톨릭 사이의 갈등이 종종 분출되기도 했지만 레오 14세가 중재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한편 바티칸은 9일 성명을 내고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가 18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다고 밝혔다. 레오 14세의 첫 일반 알현은 21일 이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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