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서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둔 피 같은 돈을 단 한 순간에 앗아가는 ‘그놈 목소리’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영화에서 자주 연출되는 허름한 모습과는 다르게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IT회사를 방불케하는 완전한 외형과 내부 시스템을 갖추고 피해자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왜 속냐’며 피해자들을 탓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은 사회에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수법을 상세히 소개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남긴다. <편집자주>
깔끔한 정장 차림에 목에는 넥타이와 사원증, 한 손에는 서류가방과 다른 손에는 커피를 들고 화려한 건물 숲 사이에 있는 한 빌딩으로 걸어 들어간다. 책상에는 개인 컴퓨터와 각종 기념일이 표시돼 있는 달력, 가족 사진까지. 서울 여의도 증권가나 경기 성남시 판교 IT단지에서나 볼법한 이 일상은 사실 중국의 한 대도시에 위치한 대규모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출근길을 재구성한 것이다.
과거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출된 것과 같이 허름하고 지저분한 사무실에서 소위 말하는 ‘작업’을 해왔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피해자들의 눈물로 벌어 들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안정된 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조직원들의 사기 고취를 위한 복지, 새로운 사기 기술 도입을 위한 인공지능(AI) 기술 연구까지 웬만한 스타트업은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단연 기술력이다. 과거에는 다짜고짜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통장이 범죄에 이용됐으니 계좌에 있는 돈을 불러주는 계좌로 송금하라”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가족이 납치됐다며 돈을 요구하는 수법도 유행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에게 알려지자 그만큼 속아 넘어가는 피해자들도 줄어들었다. 이에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새롭고 기상천외한 시나리오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피해자의 돈을 자신들이 보유한 대포통장으로 송금받는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지만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2023년 중국 베이징 등에 근거지를 두고 각종 기발한 기술을 개발해 사기 행각을 일삼아 ‘보이스피싱계의 삼성’이라는 악명을 떨친 김군일파를 검거한 안정엽 충남경찰청 형사기동대 팀장은 “기술력이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안 팀장에 따르면 의사 피해자 한 명에게만 무려 41억 원을 편취해 유명세를 떨친 이들은 사기 역사상 최초로 피해자의 통장에 있는 예치금 뿐만 아니라 대출을 실행시켜 이를 가로채는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이러한 시나리오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조직은 피해자가 아무리 실제 경찰이나 금융감독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 연결되는 ‘좀비 프로그램’을 개발해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심었다. 또한 콜센터 사무실 안에 검사복과 명패 등을 갖춘 가짜 검사실을 차려 놓고 피해자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압박하는 방식도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들의 기술력은 자체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정도로 고도화 됐었다는 게 안 팀장의 설명이다.
이들은 기술 개발이나 시나리오 개편 등 피해자를 속이기 위한 수법 뿐만 아니라 내부 조직 관리를 위한 체계도 정교하게 정비해 조직원들의 이탈과 밀고를 방지했다. 최초 인력을 충원할 때는 수급된 인원을 중국으로 초대해 각종 유흥과 관광을 제공하며 신뢰를 쌓은 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어려우면 3개월 만이라도 임시로 일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이 시기에 조직은 거액의 수익금을 안겨주며 해당 인원을 본격적으로 조직으로 끌어들였다.
웬만한 대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교육들도 마련돼 있었다. 시나리오나 사기 수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피해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 것은 물론, 우수 사례와 잘못된 사례와 관한 녹음 파일을 들려주며 마치 배우가 대본을 연구하듯 문장 하나하나 짚어가며 복기를 하기도 했다.
내부에 여성 조직원들이 다수 있다는 이유로 조직원 간 성비위를 막기 위해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경찰 수사 결과 교육을 진행한 담당자는 우리나라 지방 소재의 한 대학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대학교수로 은퇴 후 권유를 받고 해당 조직에 합류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주 옷을 가장 세련되게 입은 직원을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해 상여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반대로 가장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직원을 ‘워스트 드레서’로 선정하지만 이 경우에도 일정 금액을 쥐어주며 새 옷을 구매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는 김군일파 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수법은 다양한 조직으로 확산돼 최근에는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자동차 회사가 주력 모델에 마케팅을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스피싱·로맨스스캠·리딩방 중 성공률이 높은 팀에 유동적으로 인원을 배치하며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국내 조직의 경우 회사를 정식 업체로 등록하고 직원들을 4대보험에 가입시키는 등 사기의 양성화에 나선 상태다.
안 팀장은 “정산을 확실히 하기 위해 주급 명세서를 발행하고 직원과 조직이 모두 급여 계산을 크로스체크하는 등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운영 방식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세련돼졌다”며 “내부 체계뿐 아니라 인력 충원을 위해 팀을 따로 두고 중국으로 수급된 인원을 초대해 각종 유흥과 관광을 제공하며 자연스럽게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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