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당시 만난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밸류업 정책을 고려해 기업 대출을 조절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주주 환원 재원을 확보하려면 자본 건전성 지표인 보통주자본(CET1) 비율을 관리해야 돼 위험도가 높은 기업 대출을 적극적으로 취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금융계에서는 이를 두고 주주 환원을 위해 기업 여신을 축소하는 것은 주객전도라는 반응이 많았다.
금융지주들은 밸류업 정책을 가장 열심히 추종했다. 관치에 유독 민감한 탓이다. 금융지주들은 다른 상장사들보다 앞서 밸류업 계획을 공시했다. CET1 비율이 12~13%를 넘는 자본 초과분을 바로 주주 환원에 쓰겠다고 공언했다. CET1은 금융권의 시스템 리스크를 막기 위해 도입됐는데 거꾸로 밸류업을 위한 기준이 돼 버렸다. 특히 CET1 비율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기업 대출과 같은 기본 역할은 오히려 희생됐다.
기업의 기본 체력보다 단기간의 주주 환원 강제에 집중했던 윤석열 정부의 기조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 역시 자기자본이익률(ROE) 향상을 증시 부양의 핵심으로 뒀다. 다만 순익(분자)보다 자기자본(분모)을 손 대는 데 집중했다. 배당 및 자사주 소각 계획을 공시하라고 독려하거나 주주 환원에 세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분자인 순이익에 영향을 주는 정책은 실제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임기 내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간편하고 직관적인 주주 환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융지주는 이 기조에 열심히 따랐다. 이로 인해 주가가 오르고 주주들은 환호성을 질렀을지 모르지만 금융시장의 효율성은 떨어졌고 대출을 못 받는 기업들이 늘었다. 올해 4월 말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기술신용대출은 1년 새 17조 원가량 감소했다.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 달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자사주 소각 제도화도 공약했다. 금융지주사들은 이번에도 정부 기조에 열심히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밸류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을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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