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의 KPGA 선수권대회는 한국 골프대회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오랜 전통만 내세우는 건 아니다. 주최 측과 개최 골프장, 참가 선수, 그리고 골프 팬들의 존중과 정성, 열정이 모여 역사를 생동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왜 최고(最高) 권위인가
KPGA 선수권은 1958년 6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골프 대회로 첫선을 보인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회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코로나19로 여러 대회가 어쩔 수 없이 취소됐던 2020년에도 KPGA 선수권은 6월에서 8월로 개최 시기를 옮겨 정상 진행됐다.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68회째를 맞았다. 총상금도 16억 원으로 KPGA 투어 단독 주관 대회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우승자에게는 제네시스 포인트 1300점과 투어 시드 5년이 부여된다. 이 대회 영구 참가 자격이라는 영예도 주어진다. 대회는 2016년부터 10년째 경남 양산의 명문 코스인 에이원CC에서만 열렸고 앞으로도 에이원을 지킬 예정이라 ‘마스터스=오거스타내셔널’처럼 ‘KPGA 선수권=에이원’이라는 공식도 선수들과 골프 팬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지난해 67회 대회 때는 3, 4라운드를 2인 1조 ‘원웨이(One-way)’ 방식으로 치러 눈길을 끌었다. 인·아웃 코스로 나눠 나가는 보통의 방식과 다르게 모든 조가 1번 홀로 출발하는 방식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과 메이저 대회 중의 메이저라는 마스터스 등이 원웨이로 치러진다. KPGA 선수권 3, 4라운드가 원웨이로 열린 것은 2014년 이후 10년 만이었다.
세월이 쌓은 최고 권위에 머무르지 않고 출전 선수의 자부심을 높여주려는 정성도 특별하다. 지난해 대회 첫날 김원섭 KPGA 회장은 이 대회에 처음 참가하는 선수 20명에게 직접 기념 액자를 전달하며 격려했다. 장유빈, 조우영 등 국내 선수는 물론이고 외국 선수인 재즈 제인와타난넌드(태국)와 해외 국적 한국계 선수들까지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골프대회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대회의 일원이라는 의미를 되새겼다.
KPGA 첫 출전 기념 액자와 티셔츠, 모자를 받아 든 홍상준은 “그동안 중계로만 지켜봐 온 대회인데 실제로 출전하게 돼 무한한 영광”이라며 “KPGA 선수권은 특별함이 가득한 대회로 느껴진다. KPGA 투어 선수라면 누구나 출전하고 싶은 대회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최고(最古) 대회
KPGA 선수권 기간 갤러리들의 포토 스폿은 스타트 광장의 ‘챔피언스 월’이다. 역대 우승자들의 영광의 순간을 담은 공간이다. 2023년 대회 우승자 최승빈은 “(챔피언스 월을 지나면) 우승 당시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 같다”며 “KPGA 선수권 우승자라는 자부심과 동시에 또 한 번 우승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고 했다.
지난해 대회 때는 총 21명의 역대 챔피언들이 출전해 올드 팬과 오늘날의 팬들을 동시에 설레게 했다. KPGA 투어 통산 최다 우승(43승) 기록 보유자인 최상호와 KPGA 투어에서 유일한 노 보기 우승 기록의 조철상, 그리고 박남신, 신용진, 김종덕, 김형성, 홍순상, 이상희, 매튜 그리핀(호주) 등이다. 역대 우승자들은 멋스러운 챔피언 배지를 달고 우승 당시를 떠올리며 남다른 도전을 즐겼다.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목각 트로피는 또 하나의 볼거리다. 실제 트로피를 나무로 별도 제작해 앨버트로스, 홀인원, 코스 레코드 등에 시상한다. 이승택은 “실제 트로피처럼 잘 구현됐다. 집에 가져가서 전시해 놓고 싶다”고 했다.
에이원CC에서 열리기 시작한 2016년부터 홀인원은 7차례 나왔다. 2022년 2라운드 12번 홀(파3)에서 나온 옥태훈과 이재경의 홀인원이 마지막이다. 2017년 2라운드 하루에 홀인원 세 방이 나오기도 했다. 기준 타수보다 3타 적게 홀아웃하는 앨버트로스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에이원CC 코스 레코드는 61타다. 2018년 대회 1라운드에서 최민철이 9언더파 61타를 적었다. 2022년에는 신상훈이 3라운드에 10언더파 61타를 쳤다. 2018년에 파70, 2022년에는 파71로 치러졌다.
4년 연속 우승 포함 일곱 번 우승의 전설
가장 오랜 전통과 최고 권위 대회에 걸맞게 KPGA 선수권의 남자는 한장상이다. 일곱 번으로 최다 우승(1960·1962·1964·1968·1969·1970·1971년) 기록을 가진 그는 최다 연속 우승(4년 연속), 최연소 우승(1960년 20세 4개월 10일)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18타의 최다 타수 차 우승(1964년), 18세 2개월 15일의 최연소 출전(1958년), 최다 연속 출전(50회·1958~2007년) 기록도 한장상 몫이다. 18세에 처음 출전해 67세까지 매년 KPGA 선수권을 빛냈다.
한장상 KPGA 고문은 한국인 1호 프로골퍼인 고(故) 연덕춘(1916∼2004)의 수제자로 1950년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캐디로 일하며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1960년 KPGA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1972년까지 한국 오픈 4년 연속 우승을 포함해 7승을 올리면서 이름을 날렸다. 1972년에는 일본 내셔널 타이틀 대회인 일본 오픈에서 당시 일본 골프계의 최고 스타인 오자키 마사시를 1타 차로 누르고 우승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듬해 오거스타에서 열린 마스터스에 한국인 최초로 출전하기도 했다.
이강선은 1993년에 43세 9개월 2일의 KPGA 선수권 최고령 우승자가 됐다. 최고령 출전은 2023년 74세 8개월 17일에 티잉 구역에 선 최윤수. 당시 1라운드에 19오버파 91타를 쳤고 2라운드에 15오버파 86타를 쳤다. 기권한 선수를 빼면 꼴찌지만 손자뻘 선수들과 대등한 조건으로 경기하며 울림을 전했다.
그해 김종덕은 대회 최고령 컷 통과(62세 5일) 기록을 세웠다. 260야드 드라이버 샷을 뽐내며 거뜬하게 컷을 통과한 김종덕은 최종 라운드에 1오버파 72타를 적어내 공동 52위(2오버파 286타)로 대회를 마쳤다. 서요섭, 이형준, 정찬민, 한승수 등 현재의 투어를 대표하는 까마득한 후배들을 앞질러 화제가 됐다.
대회 72홀 최소타 기록은 2021년 262타를 친 서요섭이 갖고 있으며 72홀 최다 언더파는 2015년 장동규의 24언더파다. 당시 대회 코스는 인천 영종도의 스카이72GC(현 클럽72) 하늘 코스였다. 18홀 최다 언더파는 10언더파로 2001년 2라운드 박도규(휘닉스CC), 2016년 1라운드 박준섭, 2022년 3라운드 신상훈이 기록했다. 연장 승부는 8차례 있었다.
거목 한장상 잇는 KPGA 선수권의 남자들
김성현은 2020년 이 대회 출전 자격이 안 됐다. 월요 예선을 통해 극적으로 출전권을 얻었는데 우승까지 내달렸다. KPGA 투어 데뷔 첫 우승을 KPGA 선수권에서, 그것도 가장 만화 같은 방법으로 해낸 것이다. 4라운드 합계 5언더파 275타를 적어 2위인 함정우, 이재경을 1타 차로 따돌렸다.
국가대표 출신의 김성현은 2019년 일본프로골프 투어(JGTO)에서 먼저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한국에서는 2부 투어를 뛰었다. 한 차례 우승으로 2부 투어 상금 1위를 달리고 있었고, KPGA 선수권 월요 예선에 응시해 합격자 8명 중 8위로 막차를 탔다. KPGA 선수권뿐 아니라 KPGA 투어 역사를 통틀어서도 예선을 거쳐 출전한 선수가 우승한 것은 김성현이 처음이다.
3라운드까지만 해도 선두에 4타 뒤진 공동 8위였는데 16번 홀까지 3타를 줄이며 선두를 1타 차로 압박했고 17번 홀(파3)에서 홀인원성 버디를 잡으면서 단독 선두를 꿰찼다.
김성현은 KPGA 선수권 제패 이후 미국 진출에 박차를 가해 꿈의 무대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했다. 투어 카드를 잃고 2부인 콘페리 투어로 강등됐으나 올해 5월 어드벤트헬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다음 시즌 PGA 투어 복귀를 예약했다. 이번 KPGA 선수권에 3년 만에 출전해 좋은 흐름으로 국내 팬들과 만난다.
최승빈은 투어 2년 차였던 2023년에 이 대회 우승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성현처럼 데뷔 첫 우승을 KPGA 선수권에서 이뤘다. 마지막 날 버디 8개를 몰아치고 보기는 1개로 막아 7타나 줄이면서 2위 박준홍을 1타 차로 제쳤다. 한장상 KPGA 고문은 시상식에서 “2001년생 최승빈과 박준홍이 우승을 다투는 멋진 모습을 보니 한국 골프의 장래가 참 밝다”며 기뻐했다. 키 177㎝로 거구가 아닌데도 최승빈은 320야드 드라이버 샷을 펑펑 날린다.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낸 그는 공부하는 운동 선수 출신이다. 학창 시절 내내 학업과 골프를 병행했다. 오후 4시까지 학교 수업을 받고 오후 6시부터 3시간씩 골프 연습을 했다. 서울대를 목표로 했고 성균관대 스포츠과학과에 진학했다. 야구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가 고교 때 만다라트(목표 달성을 위한 전방위적 계획표)를 짰듯 최승빈도 자신만의 만다라트를 설정하고 PGA 투어 진출이라는 최종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KPGA 투어 3승과 일본 투어 4승이 있는 황중곤도 KPGA 선수권의 남자다. 2017년 대회 때 3라운드까지 선두에 2타 뒤진 공동 4위에서 역전 우승했다. 최종 라운드 9번 홀 이글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끝에 친형인 캐디와 뜨겁게 포옹했다. 황중곤은 “메이저 대회에서 처음 우승했고 60주년을 맞은 KPGA 선수권이라 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대회와 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2019년 공동 10위, 2022년 단독 2위, 2023년 공동 12위, 지난해 공동 18위 등 이 대회, 이 코스와 궁합이 잘 맞는다.
2022년 투어 2년 차였던 신상훈은 2라운드까지 컷 통과 선수 중 꼴찌(공동 52위)였으나 주말 이틀간 16타나 줄여 우승하는 기적을 써 내려갔다.
‘에이원의 결투’ 돌아보기…운명의 수레바퀴 18번 홀
에이원CC 18번 홀은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최종 라운드 마지막 홀에 드라마틱한 승부가 워낙 자주 펼쳐졌기 때문이다.
2016년 대회에서는 17번 홀까지 선두였던 박준섭의 티샷이 이 홀에서 투어 첫 승의 꿈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2018년에는 김봉섭이 희생양이었다. 17번 홀까지 1타 차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18번 홀 티샷 미스 끝에 더블 보기를 적어내고 말았다. 김봉섭은 문도엽, 한창원과의 연장 승부에 합류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승을 노리던 한창원 또한 18번 홀에서 진행된 연장 두 번째 승부에서 티샷이 우측으로 밀리며 페널티 구역으로 숨어 이 홀에서 버디를 잡아낸 문도엽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2019년에도 18번 홀이 우승자를 결정지었다. 3라운드까지 2위 그룹에 5타 차이로 앞서던 이원준은 17번 홀에서 보기를 범하며 서형석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마지막 홀에 들어선 이원준은 티샷이 우측 페어웨이 벙커를 지나 페널티 구역으로 향했다. 볼이 물에 반쯤 잠겼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원준은 그대로 샷을 했고 왼쪽 러프 지역으로 볼을 보낸 뒤 핀까지 40m 거리에서 세 번째 샷에 이어 2m 파 퍼트를 성공했다.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간 이원준은 18번 홀에서 진행된 연장 첫 번째 승부에서 2.9m 내리막 버디 퍼트를 꽂아 넣으며 프로 데뷔 13년 만에 첫 정상에 올랐다. 프로 입문 5년 만에 손목 연골이 닳아 없어져 더는 골프를 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고는 2년 넘게 골프채를 놓아야 했고 어렵게 복귀하고도 2017년에 디스크 파열로 또 한 번 시련을 겪었던 이원준이다.
2023년 역시 18번 홀 승부가 결정적이었다. 최승빈과 박준홍은 최종 라운드에 접전을 펼쳤고, 17번 홀에서 최승빈과 박준홍 모두 버디를 잡아냈다. 최승빈은 13언더파, 박준홍은 14언더파로 박준홍이 1타 앞섰다. 최승빈은 18번 홀에서 두 번째 샷을 홀 1.5m 옆으로 붙여 버디를 잡아내면서 박준홍과 동타를 만들며 먼저 경기를 마쳤다. 박준홍의 18번 홀 결과에 따라 우승자가 결정되는 상황. 박준홍은 통한의 보기를 범했고 자동으로 최승빈의 우승이 확정됐다.
지난해는 전가람이 3타 차의 압도적인 우승으로 5년 만에 투어 3승째를 달성했다. 14년 만에 이 대회에 출전한 스타 배상문과 김홍택, 이대한이 공동 2위를 했다. 18번 홀에서 승부가 요동치진 않았지만 전가람은 무려 20m 버디 퍼트를 넣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주먹을 불끈 쥐는 멋진 장면을 남겼다. 전가람은 “마지막 홀 20m 버디가 들어가니 어안이 벙벙했다. 올해 12월에 결혼하는데 정말 멋진 선물이 됐다”고 했다. 이 대회 여섯 번 출전해 두 번 기권, 네 번 컷 탈락으로 유독 KPGA 선수권과 인연이 없던 전가람이다. 전가람은 이번 제68회 KPGA 선수권에서 37년 만의 이 대회 타이틀 방어 기록에 도전한다. 최윤수의 1987·1988년 우승이 마지막 2연패였다. 전가람은 “올 시즌 가장 큰 목표가 KPGA 선수권 타이틀 방어”라고 했다.
대회 기간 에이원CC 남·서 코스의 18번 홀은 평소엔 서코스 5번 홀이다. 에이원CC에서 처음 KPGA 선수권이 열린 2016년에 KPGA는 갤러리 스탠드를 마련하고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위해 홀 변경을 골프장에 제안했다. 홀 순서를 바꾸면 골프장 회원과 내장객들이 헷갈릴 수 있고 기타 현실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에이원CC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8번 홀 주변에 정성스럽게 키운 나무까지 잘라내며 대회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