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국가유산 ‘명승’으로 지정된 서울 성북구 ‘성북동 별서’에 화재가 발생했다. 국가유산청의 동의하에 송석정 지붕을 걷어내고 화재를 진압하는 장면에서 얼핏 불타던 숭례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마음이 스쳤다. 다행히 4시간 만에 불은 잡혔지만 복구의 숙제가 남았다.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보다는 ‘성락원(城樂園)’이라는 옛 이름이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하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저서 ‘국보순례(눌와 펴냄)’에서 국보라 불려도 손색없을 우리나라의 5대 정원으로 경주 안압지, 창덕궁 후원,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서울 성락원’을 꼽았다. 문헌에 따르면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이 ‘성북동 별서’의 조성자이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갑신정변(1884)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경관적 가치에 역사적 가치,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 정원의 학술적 가치가 있어 1992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2008년 명승으로 재지정됐다. 불탄 송석정의 서쪽 아래 암벽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장빙가(檣氷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다. 성락원의 조성자로 알려졌던 심상응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체가 없음이 확인되면서 2020년 ‘성락원’의 문화재 등록은 해지됐고 ‘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됐다. 송석정은 1950년 이곳을 매입한 심상준 제동산업 회장이 1953년에 조성했다. 처음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당시에는 50년이 채 되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전란의 시기에 우리 문화의 명맥을 지키려 했던 그 노력까지 가치에 더해졌다.
100년이 돼야만 문화유산인가. 역사는 동떨어진 과거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가 쌓여 역사가 된다. 위기의 종로구 ‘통인시장 아트게이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복궁 서쪽 인왕산 자락을 칭하는 ‘서촌’은 조선 후기 별서 조성을 주도한 경화세족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이곳 중심부의 통인시장에 2012년 아트게이트가 조성됐다. 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황두진 건축가의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작품이다. 인근 청운초등학교 학생들부터 주민들까지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더니 “어떠한 결과물이든 한옥과 관련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황 건축가는 한옥식 목구조에 기반한 뱃머리 형태의 아트게이트를 만들었다. 통인시장이라는 큰 배가 도시를 향한 형태다. 나무처럼 보이지만 철골구조가 들어 있는 목철 합성 구조물이라 상상 이상으로 견고하다. 지붕은 기와 대신 유리를 덮어 비·눈은 막지만 햇빛은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아트게이트를 떠받치는 3개의 다리는 전설 속 ‘삼족오’를 상징한다. 황 건축가는 “불멸의 삼족오처럼 통인시장 아트게이트가 구도심 한쪽을 이렇게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시켰다”고 말했다. 아트게이트는 그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제1회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을 받았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만든 ‘트래블 북(2019)’ 서울 편에도 소개됐다. 어느새 ‘서울의 얼굴’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서울시가 전통시장 개선 사업을 위해 건축설계 공모전을 시작하면서 “통인시장 아트게이트의 존치 및 철거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건축가가 제안하라”고 공고했다. 2026년 상반기까지 75억 원을 들여 종로구 통인시장 아케이드와 보행로 200m 남짓한 공간의 디자인을 바꾸는 사업이다.
별안간 아트게이트가 철거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당선자 없음”으로 공모전 결과가 나왔다. 기존 아트게이트를 대체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모가 진행되는 동안 아트게이트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수백 명 시민들의 서명운동이 전개됐다.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보통 50년 이상의 연한이 요구된다. 하지만 꼭 50년이어야 하는지는 재고와 논의가 필요하다. 그 50년의 문턱 때문에 우리는 1983년 완공돼 남산 자락을 지켜온 힐튼호텔을 잃었다. 짧은 동시대도 역사를 써가는 과정이다. 10년, 20년이 100년, 200년을 만든다. 과정이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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