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發) 관세 전쟁 등으로 국제 통상 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한국국제통상학회장인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글로벌 통상 질서의 패러다임 전환기로 힘의 논리와 기술 통제가 핵심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며 “우리의 통상 정책을 기술과 경제안보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한국형 통상 전략을 수립해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한미 통상 협상은 단순히 주고받는 게임이 아니라 양국이 신뢰 기반 위에서 실질적 협력 구조를 설계해가는 첫걸음”이라며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한미 관계를 산업과 기술·안보 협력을 확대하는 경제안보 동맹으로 격상시키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로벌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통상 질서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지금은 단순한 통상 환경 변화기가 아니라 통상 질서의 패러다임 전환기다. 그동안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 규범 체제가 무역의 룰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기술력과 경제안보 전략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심축이다. 그 변화를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1기 통상 정책은 관세 무기화의 전환점이었다.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철강·알루미늄뿐 아니라 세탁기, 태양광 패널 등까지 대상을 확대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전체에 충격을 줬다.
-트럼프 2기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출범과 동시에 ‘관세 재무장 전략’을 명확히 했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일괄적으로 10% 기본관세를 부과하고, 대미 무역 흑자 규모를 기준으로 상호관세도 매긴다. 자동차·철강 등 품목별 관세도 때리고 있다. 이는 사실상 ‘글로벌 수입에 대한 총괄세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기존 무역 질서이자 규범인 자유무역 체제가 무력화되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통상 패러다임 변화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 있다면.
△우리도 통상 정책을 기술과 경제안보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동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수동적 대응으로는 글로벌 공급망이나 기술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크다. 정부는 먼저 반도체, 인공지능(AI), 배터리 등 전략산업을 중심으로 맞춤형 지원 정책 패키지를 가동해야 한다. 단순히 보조금 지급 중심이 아니라 세제 인센티브 확대, 과감한 규제 개혁, 무역금융·수출보증 확대, 국제 표준화 지원, 핵심 인재의 국내 유치 등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계해야 한다. 특히 기술 초격차 확보 전략을 통상과 산업, 인력 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결해 추진해야 한다. 기업은 단순한 제품 수출이나 해외투자를 넘어 글로벌 비즈니스 생태계 혁신을 주도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또 생산 기지를 다극화해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다양한 시장에 맞춘 현지화 전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핵심 방안은 민관이 머리를 맞대서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한국형 통상 전략을 수립해 실행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 합의 이행을 위한 큰 틀에 합의했다.
△중국은 희토류의 수출제한을 풀고, 미국은 반도체 수출 통제를 완화하고 중국 유학생을 계속 받아들이는 선에서 합의했다.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주고받기식으로 봉합한 것이다. 최근 미중 협상은 과거처럼 포괄적인 무역 합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이슈별로 주고받는 ‘모듈형’ 혹은 ‘상호 교환적’ 협상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협상 방식이 긴장을 일부 완화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기술 패권을 둘러싼 근본적 대립 구도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표면적으로는 긴장 완화의 신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음 국면을 준비하기 위한 일시 정지, 전략적 멈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일시 전략적 멈춤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관세 전쟁은 미국 내 소비자물가와 기업 비용을 끌어올렸다. 중국의 경우 수출 둔화와 내수 불안으로 공장 폐쇄와 실업 문제에 직면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고 미중 양국 경제 모두 피로감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휴전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반도체·AI·배터리 등 전략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역시 내수 중심의 ‘쌍순환 전략’을 통해 대외 의존도를 줄이며 독자적 산업 체계 구축에 나서고 있어 양국 간 전략적 충돌의 불씨는 남아 있다. 양국 간 무역 전쟁의 일시적 완화 또는 전략적 조정이지 구조적 갈등 해소나 완전한 휴전으로 보기 어렵다.
-미국의 관세정책이 한국 무역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철강 등 일부 산업에 집중된 수출구조는 외부 통상 충격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이 대미 수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품목들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 대중 수출 통제 조치, 관세정책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한국의 전략산업이 미국 제조업 부흥 전략의 직접 타깃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경제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트럼프 1기와 2기를 비교해보면 관세정책의 방향성과 그에 따른 한국 수출 영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발 관세정책이 트럼프 1기에는 한국에 ‘틈새 기회’를 제공했다면 2기에는 전방위적 압박 구조로 전환했다. 트럼프 1기에는 관세 부과가 주로 중국산 수입품에 집중됐다. 이로 인해 한국은 직접적 피해보다 외려 간접적 이익을 본 측면이 강했다. 중국산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밀려나면서 한국산 자동차, 전자 부품, 기계류 등이 대체재 역할을 하며 대미 수출을 증가시켰다. 실제로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2017년 179억 달러에서 2021년 231억 달러로 확대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의 관세정책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직접적이다. 모든 국가를 겨냥한 기본관세와 상호관세, 품목별 고율 관세 등이 함께 추진되면서 한국 역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됐다. 이에 따라 트럼프 1기와 같은 반사이익은 크지 않을 것이며 외려 수출 감소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2기의 광범위한 관세는 한국 수출에 상당한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한미 통상 협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고받는 게임이 아니라 양국이 신뢰 기반 위에서 실질적 협력의 구조를 설계해가는 첫걸음이다. 그 출발점에서 한국은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경제안보 동맹 구조로 한미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단순한 관세 조정 문제를 넘는 차원이라는 얘기다. 향후 미국의 산업·기술 전략 속에서 한국이 어떤 파트너로 자리매김할지, 글로벌 통상 질서 변화 속에서 어떤 위상으로 기능할지 가늠하는 분기점이다. 한미 양국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얼마나 책임 있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단기 성과를 넘어 구조적인 관계로 진화할 수 있다.
-미국은 한국과의 무역 적자를 줄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미국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사상 최대인 660억 달러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미국은 이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단순히 관세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미 수입 확대와 미국 내 투자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이 요구를 무조건 방어하기보다 전향적인 수입 확대 방안을 일부 제시하며 그에 상응하는 예외 조건에 대해 명확히 협상하는 것이 현실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전략을 설명하면.
△한국은 반도체·배터리·조선업 등 전략산업의 핵심 제조국이다. 미국의 글로벌 산업 정책에 있어 가장 긴밀한 협력 대상인 셈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 좋은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 조선·원전·에너지·반도체 분야 등에서 양국 협력 방안을 제시해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미국산 청정에너지 설비, 액화천연가스(LNG) 등의 수입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방안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 당국의 정보 제공 요구, 인증 규제 등에서 예측 가능하고 부담이 적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들이 이미 미국 내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창출한 파트너’라는 이미지를 강화해주고 협상에서도 활용도를 높여줄 것이다.
-대미 협상에서 어떤 점들을 반드시 챙겨야 하는가.
△첫째는 자동차·철강 등 주요 품목에 대한 관세 부담 완화다. 이는 우리 산업의 경쟁력과 수출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로 중요한 협상 목표가 돼야 한다. 두 번째는 좀 더 본질적인 목표, 즉 미국과의 통상 관계에서 한국이 단순한 수출국이 아니라 산업과 기술·안보 협력을 확대하는 전략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미국이 한국을 통상 관계의 일방적 대상이 아니라 신뢰 기반의 산업·기술·안보의 공동 설계자로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He is…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를 거쳐 2008년부터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한국국제통상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민간자문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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