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후속 관세 협상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느니 그 돈으로 한국의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게 낫다는 지적이 미국 진보 성향 싱크탱크에서도 나왔다. 미국과 한국 모두 정확한 이해 득실 계산도 없이 무역 협상에 임하고 있다는 취지의 지적이다. 실제 한국의 경우 미국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줄 경우 국부가 심각하게 유출되고 외환위기까지 걱정해야 할 판으로 몰린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25% 관세를 그대로 안고 가는 게 낫다는 평가까지 제기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또한 트럼프 행정부의 막무가내식 투자 협박과 까다로운 비자 조치로 점점 투자를 꺼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애매하게 돌아가자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전문 인력들이 미국인들을 훈련시켜 달라”며 이민 정책에 다해 일단은 한발을 빼는자세를 취했다. 다만 지지층의 거센 이민 단속 요구와 관세 효과에 따른 정치적 위기를 고려할 때 트럼프 행정부가 순순히 한국의 경제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외교가 곳곳에서 나온다.
美 진보 경제학자 “韓, 트럼프에 488조 주느니 수출기업 지원하라”
미국 진보 성향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지난 11일(현지 시간) CEPR 홈페이지에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수출 업체에 돈을 건네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투자 약속의 성격이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묘사하는 방식과 약간이라도 비슷하다면 한국과 일본이 합의를 수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ungodly)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한국이 지난해 대미 상품 수출액이 국내총생산(GDP)의 7.3% 정도인 1320억 달러(약 184조 원)였던 점을 감안해 미국이 관세를 15%만 붙일 경우 이 액수는 5% 감소한 1250억 달러(약 174조 원)에 그칠 것으로 내다왔다. 그러면서 관세율이 25%로 더 올라가더라도 추가적인 수출 감소액은 125억 달러(약 17조 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125억 달러의 수출을 보호하려면 3500억 달러(약 488조 원)를 내야 한다고 한국에 요구하는 것”이라며 “그 금액의 20분의 1을 수출 손실로 피해를 입은 근로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조언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이 한미 무역협정 내용을 비판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거래에서 각국이 이해 득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자기가 추정한 한국의 수출 피해 규모 산정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한국이 이번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또 다시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으로 내다봤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어떤 거래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느낀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쉽게 돌아와서 내년, 내후년, 또는 그 다음 어느 시점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특히 한국과 일본, 대만이 안보를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을 믿는 일은 더더군다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은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러시아의 5배 이상이라서 조금만 있으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군대를 구축할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대만은 총 경제 규모가 중국의 3분의 1 밖에 안 되고 성장 속도도 더 느리다”며 “중국의 군사력에 필적할 수도 없고 미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기에 중국과 어느 정도 합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3년간 '韓 GDP 20%' 달러로 상납 요구…25% 관세가 나을 수도
미국이 한국에 내건 무역 협상 조건을 두고 미국 내에서도 불공정하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엠마 휘트마이어 연구원과 다르시 드라우트-베하레스 연구원도 한미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달 21일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 중심적 외교 접근법과 한미 동맹의 깊은 우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블룸버그통신은 10일 미국 이민 당국의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급습 사례를 거론하며 “해당 사건이 미국 정책 환경의 안정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흔들 수 있다”며 “정치·규제적 위험이 이익보다 큰지에 대한 의문이 기업들에 제기된다”고 꼬집었다.
앞서 한국은 대미 투자 3500억 달러, 에너지 분야 1000억 달러 구매 등을 조건으로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기로 7월 30일 미국과 합의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각국 상호관세 행정명령 서명 하루 전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며 크게 안도했다.
그러다 후속 관세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터무니 없는 조건으로 대미 투자를 요구하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인식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하워드 러트닉 장관은 11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무역 협정을 수용하지 않으면 (기존 25% 수준의) 관세를 내야 한다. 유연함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일본과의 협정을 한미 협상의 이정표로 제시했다. 러트닉 장관은 이날 일본이 내는 5500억 달러(약 766조 원) 규모 대미 투자금을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송유관 건설 등 미국이 원하는 곳에만 쓸 것이라며 한국도 이와 비슷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는 또 일본이 낸 5500억 달러를 회수할 때까지는 양국이 수익을 50대50으로 배분하되 이후에는 미국이 수익의 90%를 가져가기로 했다는 미일 협정 세부 내용도 소개했다.
러트닉 장관이 고집하는 조건은 한국 정부가 예상했던 바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한국은 전체 대미 투자액 가운데 5%만 지분 투자 형태로 투입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credit guarantees) 형태로 지불할 생각을 했다. 미국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한국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20% 정도, 내년도 예산안(728조 원)의 67% 정도를 3년 동안 매년 달러 현금으로 미국에 넘겨줘야 한다. 초대형 달러 수요가 발생하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것은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글로벌 약달러 정책과도 반대 흐름을 보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4163억 달러 수준이고,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규모는 연간 200억~300억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베이커 선임연구원 말대로 한국 입장에서는 3500억 달러를 트럼프 행정부에 퍼주느니 차라리 상호관세와 자동차 품목 관세 25%를 맞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 셈이다.
김정관 ‘빈손’ 귀국, 여한구 ‘소방수’ 출국…한국 기업들 투자 심리 급속 냉각
한미 양국 간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후속 관세 협상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 후속 협의를 위해 급히 출국해 12일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만났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14일 돌아왔다. 이후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곧장 바톤을 이어받아 15일 미국으로 향했다. 협상이 더딘 진전을 보이는 가운데 대화의 불씨만 겨우 살아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지난 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일본과 외환보유고도 차이가 있고 기축통화국도 아니라서 (투자) 구조를 어떻게 짤지 문제가 많다”며 “근본적으로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을 같이 고민하고 미국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에 해답을 달라는 문제가 교착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의 요구를 덜컥 받아들였다가 ‘손해 보는 협상을 했다’는 프레임에 갇혀 정치적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미일 무역 협정을 주도한 이시바 시게루 전 일본 총리가 각종 비판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 7일 결국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모습을 이 대통령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이 대통령은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뭘 얻으러 (미국에) 간 게 아니고 미국의 일방적 관세 증액을 방어하러 간 것”이라며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느냐. 사인을 못 했다고 비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국 기업들 역시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근로자 구금 사태를 계기로 대미 투자에 점차 미온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해 대미 투자를 결정한 대다수 대기업이 미국 현지 전략을 재검토하고 나섰다. 이들은 멕시코·캐나다 등 우회 생산 거점을 검토하거나 미국 법인 운영 규모 축소, 자금 감축 등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미국이 관세에 이어 이민 정책으로도 압력을 넣자 대미 투자 확대에 따른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까닭이다. 괜히 트럼프 대통령을 믿고 미국 사업량을 늘렸다가 비자 문제로 인력 수급에 차질만 빚어질 수도 있다는 점도 투자를 망설이게 되는 요인이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11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현지 자동차 전문 매체 오토모티브 뉴스의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이번 일(조지아주 구금 사태)로 최소 2~3개월 간 공사의 지연이 불가피해졌다”고 밝혔다.
트럼프 “해외 기업, 미국인들 훈련시켜주길”…지지자들은 유화책에 강력 반발
미국 조지아주 근로자 구금 사태로 한국 등 외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시각이 크게 바뀌자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한발 물러선 듯한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서 “나는 다른 나라나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겁먹게 하거나 의욕을 꺾고 싶지 않다”며 “우리는 그들의 직원을 환영한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며 “외국 기업들이 매우 복잡한 제품·기계 등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갖고 미국에 들어올 때 자국의 전문 인력을 일정 기간 데려와서 어떻게 만드는지 미국인들을 훈련시켜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인공지능(AI) 등 미국이 우위에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동맹에도 철저히 장벽을 높이면서 외국의 기술만 미국에 전수하라는 주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외국 기업이 미국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시기를 “그들이 미국에서 점차 철수해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로 못박으면서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반도체·컴퓨터·선박·열차 등 다른 나라에서 배워야 하거나, 우리가 과거에 잘했지만 지금은 다시 배워야 하는 많은 제품에 관해 막대한 투자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전문 인력의 미국 거주 필요성을 외국 기업과 본인 지지층에게 모두 전파한 메시지였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인 노동자 등 이민 노동력에 의존하는 산업이나 유학생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NYT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 정책 경제와 충돌할 때는 경제를 우선시한다고도 전했다.
정작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은 이민 정책에 대한 이 같은 유화적 태도에 분노를 표출했다. 지난 5월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이 “중국 유학생 비자를 공격적으로 취소하겠다”고 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다시 60만 명의 중국 유학생을 받겠다고 밝히자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을 대표하는 마조리 테일러(공화·조지아) 하원의원은 X(옛 트위터)에서 “중국 공산당에 충성할지 모르는 60만 명의 중국 학생이 미국 대학에 다니도록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극우 인플루언서 로라 루머도 중국 유학생을 ‘공산당 간첩’으로 규정하면서 비자 발급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애비게일 잭슨 백악관 공보담당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 정책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취한다”며 “불법체류자는 누구나 추방 대상이지만 우선순위는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범죄자들”이라고 해명했다. 미국 보수 성향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의 데이비드 비어 이민 분야 책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한 수사를 사용하지만, 경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에 대해선 어느 정도 열린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관세 경제와 이민 정책이라는 정권의 두 정체성 사이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 약 8개월 만에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모양새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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