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1923~2023년) 전 미국 국무장관은 생전에 인공지능(AI)을 15세기 유럽에서 인쇄술을 도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에 비유했다. 인쇄술이 중세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AI가 인류 문명의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봤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요시미 순야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인쇄혁명은 종교개혁, 르네상스, 과학기술 발전, 근대 교육, 시민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런 인쇄 혁명에 비견되는 AI 시대의 심화에 맞춰 우리나라에서도 교육 혁명이 중요한 화두가 됐다. 이재명 정부 역시 AI 교육 강화를 추진하면서 교육 분야 국정 과제 중 하나로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동안 일각에서 제기된 ‘서울대 폐지론’에서 벗어나 지방 거점 국립대(9개)의 위상을 서울대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미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방 거점 국립대에 대한 큰 폭의 예산 지원과 우수 교수에 대한 보수 인상 등을 제안했고, 최교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교육 정상화와 지역 균형발전을 표방하며 이 프로젝트의 적극적인 추진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염재호 태재대 초대 총장은 2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AI 시대가 진행될수록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류가 이른바 ‘AI 휴먼’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바뀔 것”이라며 “이렇게 문명사적 패러다임 변화가 이뤄지는 판인데 우리나라 교육 등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인쇄 혁명 이상으로 현대 문명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는 AI 시대에 교육 등 국가 재설계를 통해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정치학 박사로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와 19대 총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 SK(주) 이사회 의장, 국가인공지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2023년부터 태재대를 이끌며 교육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한국판 미네르바스쿨’로 불리는 태재대는 지난 2년간 각각 몇십명 규모의 학생들을 뽑아 세계를 돌며 현장과 AI 중심 교육을 하고 있다. 국내 처음으로 9월 학기제를 도입했으며 학생 주도 교육을 중시하고 영어로 수업한다. 학생들은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고 있는데 3년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유럽에서 공부하고 마지막 1년은 국내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이 대학 2학년생들은 지난 5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컴퓨터 휴먼 인터액션 국제대회에서 세계 유수의 학부·대학원 84개팀 중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태재대는 특히 자체 AI 교육 플랫폼과 글로벌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활용하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하도록 하되 학제 간 융합을 중시한다. 염 총장은 “태재대에서 특허를 출원한 AI 교육 플랫폼인 ‘런 메이트’는 학생들의 자기주도 학습과 피드백을 통해 맞춤형 교육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며 “이제는 대학들이 저성장 고착화 타파와 ‘피크 코리아’ 극복을 위해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핵심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창업자가 지난해 AI로 단백질 구조를 정확히 예측해 신약 개발을 가속화한 공으로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하는 등 AI와 핵심인재의 영향력은 산업과 바이오헬스·생활·국방 등 전방위적 파급효과를 낳고 있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AI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범용인공지능(AGI)이라는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 시기를 기존 2045년에서 2029년으로 앞당겼다. 결국 우리 대학들이 특화·차별화 전략을 펴야 하는데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평등 위주의 교육으로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염 총장의 분석이다. 그는 “AI 시대가 진전될 수록 대학도 급격한 변화를 요구받는데 우리 대학들은 여전히 무풍지대”라며 “미국 대학들은 올해에만 250개나 매물로 나와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를 정도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하버드대 등 최상위 대학들의 다양성·형평성·포용(DEI) 정책을 문제 삼고 예산 지원 삭감 등으로 옥죄면서 인재 이탈이 이뤄지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 틈을 유럽, 중국·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 파고들며 인재 유치에 나서고 있으나 우리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들은 손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염 총장은 “잠재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각각 1%대, 0%대로 추락한 상황에서 교육의 차별화, 과학기술 혁신, 벤처·스타트업 활성화 및 글로벌화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며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시대에 맞게 스탠퍼드대 D스쿨,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올린공대 같은 창의·혁신 교육을 하고 이공계 우수인재 육성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대학에 대한 규제를 풀고 재정 여건 확충을 위한 중견기업 주식신탁 대학 연구개발(R&D) 투자와 졸업 기부 시스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교육혁명과 함께 정치·행정 등 새로운 사회 시스템과 범국가적 구조 개혁을 추진해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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