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연내 금리 인하 신중론과 함께 불현듯 ‘주가 고평가론’까지 제기하자 미국 증시는 물론 한국 등 전 세계 주식·외환시장까지 연일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미래 성장성을 보고 투자하는 기술주들이 특히 타격을 입은 모양새다. 파월 의장의 발언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 영향이 지난 달부터 겨우 경제 지표에 반영됐다는 이유로 글로벌 경기 상황을 더 지켜본 뒤 투자해도 늦지 않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파월 의장은 미국의 고용 시장이 수요와 공급이 모두 악화된 상태임은 인정하면서도 관세발(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위험을 감안하면 금리를 빠르게 내릴 수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월가에서는 현 금리·주가 수준에 대한 파월 의장의 조심스러운 행보로 볼 때 연준의 움직임이 당분간 주식시장에 큰 호재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 엔비디아와 챗GPT 개발사 오픈AI 간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 계약이 사실상 과거 ‘닷컴버블’ 시절의 상호출자 구조와 유사하다는 지적까지 이른바 ‘AI 거품론’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어 한 동안 주가 상승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월 “현 주가 고평가” 한마디에 뉴욕 증시 연일 하락…코스피도 ‘흔들’
지난 23일(현지 시간)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0.19%)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0.55%), 나스닥종합지수(-0.95%)는 장중 날아온 파월 의장의 한 마디에 추풍낙엽처럼 일제히 쓰러졌다. 지난 17일 연준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9개월 만에 금리를 0.25%포인트 내린 이후 추가 인하에 대한 기대를 키우던 가운데 파월 의장이 갑자기 주식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언급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파월 의장은 23일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에서 열린 상공회의소 ‘2025 경제 전망’ 오찬 행사에서 “예상보다 인플레이션 위험이 지속되는 힘든 상태”라며 “노동 수요와 공급도 이례적이고 도전적으로 감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파월 의장은 그러면서 “여러 지표로 볼 때 주가도 상당히 고평가돼 있다”고 주장했다.
파월 의장은 또 다음 금리 인하 시기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공격적으로 통화정책을 완화하면 인플레이션 억제 작업을 미완으로 남기게 되고, 2% 목표치를 회복하기 위해 (금리 인상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꿔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통화를 제한하는 정책을 너무 오래 유지하면 노동시장이 불필요하게 약화될 수 있다”며 “(물가와 고용의) 양면적 위험이 존재할 때 이를 피할 길은 없다”고 우려했다.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촉발한 주요 원인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을 노골적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는 “올 들어 8월까지 개인소비지출(PCE)은 전년 대비 2.7% 상승했고 이는 상품 가격이 주도했다”며 “광범위한 물가 압력이 아니라 관세를 반영한 데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물가 상승이 몇 분기 동안 이어지면서 다소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그 영향이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파월 의장 발언의 여파는 23일 뉴욕 증시 하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상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던 코스피와 코스닥지수도 24일 0.40%, 1.29%씩 하락했다. 외국인투자가들의 주식 매도가 이어지자 이날 원·달러 환율도 1397.5원까지 치솟아 지난달 21일(1398.4원) 이후 한달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 야간 거래 때 장중 1400원 벽을 돌파하기도 했다.
엔비디아 ‘돌려막기’ 의심도 고개…‘AI 거품론’도 확산
파월 의장의 증시 고평가 언급에 따른 악영향은 24일에도 계속됐다. 24일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지수(-0.37%)와 S&P500지수(-0.28%), 나스닥지수(-0.33%)는 파월 의장 발언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이틀째 약세를 이어갔다. 전날 2.82% 급락한 엔비디아가 또 다시 0.82% 하락한 것을 비롯해 상당수 기술주들이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파월 의장의 발언은 특히 그간 거품론이 집중적으로 제기된 AI 관련주에 대한 투자 심리를 빠르게 냉각시켰다. 앞서 엔비디아는 지난 22일 오픈AI와 새로운 전략적 협약을 체결하고 최대 1000억 달러(약 140조 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엔비디아는 자사의 첨단 AI 칩을 사용해 오픈AI 모델을 학습·배포할 수 있는 10기가와트(GW) 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공표했다. 10GW는 원전 10기에 해당하는 규모다. 엔비디아가 이번 거래를 통해 오픈AI 지분도 일부 받기로 했다. 투자금은 단계적으로 제공되고 첫 100억 달러는 첫 1GW 규모의 컴퓨팅 파워가 배치될 때 투입된다. 투자의 1단계는 내년 하반기 엔비디아 차세대 AI 칩인 ‘베라 루빈’을 활용해 가동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과 함께 CNBC와 인터뷰를 갖고 “10GW는 400만∼500만 개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해당한다”며 “이는 엔비디아가 올해 출하할 총량과 같고 지난해의 두 배”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월가에서 이 계약을 두고 엔비디아가 ‘돌려 막기’ 식 매출 유지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문 부호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엔비디아가 오픈AI에 자금을 지원하고 오픈AI가 수익을 내면 그 돈으로 엔비디아 반도체를 구입하는 구조인데 사실상 ‘순환출자’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월가에서는 이 방식이 과거 닷컴버블 시기 일부 통신 장비 업체가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번스타인 리서치의 스테이시 라스곤 애널리스트는 고객 노트에서 “분명히 순환 우려를 부채질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포트 글로벌 증권의 제이 골드버그 애널리스트도 “경기 하락 국면에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월가 내 AI주 거품론은 사실 지난달 18일 CNBC가 올트먼 CEO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미 불거진 상태다. 당시 CNBC는 올트먼 CEO가 기자들과 가진 저녁 자리에서 만나 15초 동안 ‘거품’이란 표현을 세 차례나 반복하면서 “이미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올트먼 CEO는 또 “미국이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 있다”며 “추론 능력은 중국이 아마 더 빨리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대해서도 “내 직감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투자자들이 AI에 과도하게 흥분해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 증시는 당시에도 이 발언에 줄줄이 내림세를 보였다.
AI주 거품론은 이후 알리바바·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의 ‘탈(脫)엔비디아’ 움직임에 더 빠르게 확산했다. 황 CEO도 지난달 27일 2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중국 매출을 포함하지 않은 하반기 매출 전망을 제시했다.
연준 인사들 잇따른 ‘연내 금리인하 신중론’…26일 8월 PCE 주목
이달 FOMC 회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연내 대폭적인 금리 인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낸 연준 인사는 파월 의장뿐이 아니다. FOMC 회의 투표권자인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도 이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를 통해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는 가정 하에 지나치게 앞당겨 금리를 인하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지난주 연준의 0.25%포인트 금리인하에 찬성했지만 향후 추가 인하에는 소극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날에도 CNBC에서 “미국 정책 금리의 중립 수준은 지금보다 1.0~1.5%포인트는 낮다”면서도 “공격적으로 (금리 인하에) 나서는 데는 신중해야 하고 인플레이션을 반드시 2%로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투표권자인 알베르토 무살렘 세인트루이스연은 총재도 22일 워싱턴DC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열린 공개행사 연설에서 “관세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직접적이고 일회적인 영향은 무시하는 게 적절하지만, 이 같은 영향이 너무 오래 유지되면 물가 안정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완화적이 되는 상황을 피하면서 추가 금리 인하를 할 여지는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FOMC 회의 투표권이 없는 연준의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연은 총재도 같은 날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너무 높았던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다”며 “지난주 연준이 공개한 경제전망(SEP)의 금리 전망 점도표(연준 위원들의 금리 전망치를 점으로 표시해 분기마다 발표하는 표)에서 연내 1회 금리 인하만 기재했다”고 밝혔다.
반면 연준 내에서 대표적 ‘친(親)트럼프’ 인사로 꼽히는 스티븐 마이런 이사는 2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경제클럽 연설에서 “단기 금리를 (적정치보다) 약 2%포인트 정도 높게, 너무 긴축적으로 두는 것은 불필요한 해고와 더 높은 실업률의 위험에 빠뜨린다”며 “현 통화정책은 매우 제한적이고 연준의 고용 극대화 임무에 실질적 위험을 제기한다”고 반박했다. 마이런 인사는 이달 FOMC 회의에서 유일하게 ‘빅컷(0.50%포인트 금리 인하)’에 투표한 인물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으로 FOMC 회의 직전 취임한 그는 사상 처음으로 연준 이사와 백악관 국가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겠다고 밝혀 중립성 논란에 휩싸였다.
연준은 지난 17일 금리를 0.25%포인트 내리면서 점도표 상으로 올해 남은 두 차례 FOMC 회의에서 금리 0.50%포인트를 추가로 내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날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방기금금리 선물 시장은 연말까지 기준금리가 50bp(bp=0.01%포인트) 인하될 확률을 74.4%로, 25bp만 내릴 확률을 24.1%로 각각 반영했다. 50bp 인하 확률은 17일 81.6%에서 7.2%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연준의 금리 판단과 주식시장의 반등 여부는 단기적으로 오는 26일 발표될 8월 미국 PCE 물가지수가 가를 것으로 보인다. PCE 물가지수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참고하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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