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상아빛 돌 조각이 중력을 거스른 듯 날렵하게 섰다. 끝을 부드럽게 둥글린 역삼각 구조가 인상적인 이 조각의 이름은 '루시'. 에티오피아 사막에서 발굴된 320만 년 전의 화석이자 '최초의 인류'로 추정된 여성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각, 영상, 설치, 건축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 들며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해온 최재은 작가는 이 고대 여성의 골반 뼈에서 생명의 근원을 읽었다. 그리고 이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히말라야산 한백옥을 완전한 세포 구조를 연상하게 하는 육각형으로 잘라 촘촘히 결합, 네 개의 골반 뼈 형태로 쌓아 올렸다. '루시'의 압도적 존재감에 이를 둘러싼 자작나무 거처는 간과하기 쉽지만 더 중요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인류의 지난 긴 시간을 지켜온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과 유럽 등 국제 무대에서의 활약으로 먼저 주목받은 작가 최재은(72)의 한국 첫 국공립미술관 개인전 '약속(Where Beings Be)'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기존 대표작부터 신작까지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심도 깊게 조망하는 자리다. 전시 제목인 '약속'은 공생의 약속(共生之約)을 의미한다. 문명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시공을 관통하며 이어온 자연과 인류의 상호 연대성을 되새기게 하는 개념이다. 작가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을 걸어온 존재들(Beings)은 모두 얼기설기 실타래처럼 엮어서 지금껏 이어져왔다고 바라본다.
전시는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루시'를 시작으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라는 5개 주제로 연결되며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게끔 이끈다. 320만 년 전 '루시'에서 출발한 인류는 긴 시간을 지나며 자연과 공생의 약속을 잊게 되고 기후 위기와 생태 파괴를 불러 오는데 그에 대한 경고가 '경종'이라는 주제로 전시된다. 이 공간에서는 검은 바다 이미지 위로 지구 여러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영상 작업 '대답 없는 지평'이 상영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문제가 어둡게 외면 받는 현실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소우주'에서는 땅 속으로 시선을 돌린다. 일본의 전통 종이를 세계 각지의 땅 속에 일정 시간 묻어두는 과정을 통해 겹겹의 지층이 품고 있는 시간을 드러내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중 일본 가루이자와 숲속에서 진행된 작업 일부를 소개한다. 이어지는 '미명'은 압도적인 스케일로 지구의 생명력을 말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한 들꽃과 들풀을 수집해 나무 패널에 압화한 후 그 이름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는데 전시장에는 이렇게 이름을 찾은 560여 점의 생명이 모였다. 산업혁명 이후 멸종된 종의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하나씩 부르는 사운드 작업 '이름 부르기'도 이 공간에서 함께 울려퍼진다. 사라져가고 있는 세계의 규모와 속도를 실감하게 하는 작업으로 독특한 감상을 안긴다.
'자연국가'는 비무장지대(DMZ)를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작가의 구상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2014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국제 협업으로 구축된 아카이브 영상과 관람객이 DMZ를 향해 종자볼을 보내는 참여형 플랫폼 등을 선보인다. 관람객이 직접 해바라기 씨앗을 흙과 함께 빚어 작은 생명의 단위인 종자볼을 만들어보는 참여형 프로그램도 전시 중 열린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개인의 작은 실천이 자연 회복과 공생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4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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