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록 특파원의 뉴욕 포커스
엄중한 트럼프 시대, '원팀'으로 힘 모아야 [김흥록 특파원의 뉴욕포커스]
경제·마켓
2025.01.12 18:24:50
우리나라 정치 혼란이 가중된 원인 중 하나로 정치권 양극단에서 만들어낸 대안현실(alternative reality)이 지목되고 있다. 한쪽은 일제 잔재 세력이 초월적 권력을 휘두르며 특정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정부 기관 주요 관계자가 모두 합리적·이성적 판단 능력이 결여됐다는 대안현실을 믿고 있다. 또 다른 쪽은 친중·종북 세력이 선거 시스템을 장악해 선거 부정이 팽배하고 이로 인해 상대방이 의회 권력을 차지했다는 서사를 믿고 있다. 대안현실론자들의 시각으로는 상대 진영은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서로의 존재를 완강히 부정해오다 계엄과 탄핵으로 충돌한 것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축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 캐나다도 국가적 리더십 위기에 봉착했다. 세계 각국이 정치 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가 각국의 국내 문제 탓만은 아닐 것이다. 블룸버그의 한 칼럼니스트는 12·3 계엄 이후 “미국의 가까운 동맹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라며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의 쇠퇴 때문일 수 있다”고 썼다. 때마침 달러 패권 등 국제 경제 분야 권위자인 배리 아이컨그린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와 인터뷰할 기회가 생겨 이 문제에 대해 물어봤다. 그 역시 미국이 세계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 동맹국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냉전 이후 오랫동안 중도적 정책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 유지에 방점을 두던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가 약 10년 전부터 자국 이익 추구로 변하면서 동맹국들의 경제와 산업, 외교 환경의 변화도 불가피해졌고 이 과정에서 극단주의자들의 설 자리가 커졌다는 진단이다. 한 나라의 정치·경제 상황이 세계 정세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글로벌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은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이 맞다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은 앞으로 4년간 이전보다 커질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세계의 안정이나 미국의 리더십보다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더 많다. 더욱이 2기 출범을 앞둔 트럼프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그는 최근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공언했다. 파나마 운하의 수수료가 높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운하를 미국에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또 캐나다에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게 어떠냐”고 자극했다. 미국에 경제적 효용이 있다면 상대 국가의 주권도 불가침 영역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신호다. 트럼프의 제국주의 행보는 세계 각국에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린란드를 미국이 편입할 수 있다면 2022년 러시아가 주민 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을 편입한 사건도 정당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워싱턴포스트는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두고 “중국이 대만을 무력 지배하려는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사학”이라고 말했다. 세계 정세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하고 대외 변수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앞으로 더 큰 갈등이 초래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치권은 대안현실에 기반한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2025 전미경제학회에서 기자와 만난 정치경제학자 페렌츠 슈츠 스톡홀름대 교수는 “대안현실이 확산할수록 유권자들이 잘못된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경제적 비용은 커지고 신뢰 붕괴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정치권과 산업계가 원팀이 돼 트럼프 정책 대응에 힘을 모아야 하는 시기다. 우리가 맞닥뜨린 글로벌 현실은 대안현실보다 더욱 엄중하다.
김광수의 中心잡기
탄핵 정국 속 더 중요해진 대중 외교[김광수특파원의 中心잡기]
경제·마켓
2025.01.05 18:18:08
“계엄 사태 뒤에 숨지 마라.”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이후 모든 언론사의 관심이 계엄 사태를 비롯해 탄핵 정국으로 쏠릴 당시 타사 후배가 편집국장으로부터 받은 지시라며 전해준 말이다. 언론의 성격상 특정 이슈로 관심이 집중될 경우 상대적으로 다른 뉴스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제외하면 최근 한 달 대한민국의 관심사는 온통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에 쏠렸다. 관련 뉴스를 취재하는 대통령실·국회·국방부·검찰·법원 등을 담당하는 기자들에게 업무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방송 뉴스 시간이나 제한된 신문 지면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어지간한 뉴스거리가 아니고서는 관심을 받지 못해 예상치 않게 ‘개점휴업’에 놓인 기자들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는 기자들에게 계엄 이후 현재 상황을 핑계로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해당 언론사 간부의 말은 시의적절한 경고였다. 위기 상황에 처한 나라 걱정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평소처럼 주어진 일을 하는 게 기본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권한대행을 맡은 직후 국정 안정을 강조하며 공직자들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만큼 국제 정세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형국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한 지 3년을 향하고 중동의 불안감은 여전한 상태다. 전 세계는 패권 국가인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20일(현지 시간) 취임한 후 벌어질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과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트럼프가 벌일 무역전쟁 2라운드에 대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관세 압박과 더불어 중국의 추격만으로도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 수시로 변하는 국제 정세까지 더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해 500개 중국 진출 기업을 대상으로 경영환경 실태조사를 한 결과 53.8%의 기업은 중국 대내 환경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의 저성장이 우려되고 있지만 당국이 경기부양책을 쏟아내고 있어 중국 사업 담당자들은 사업 계획을 조정하느라 연말연시를 정신없이 보내는 중이다. 중국 말처럼 한국과 중국은 떠날 수 없는 이웃이다. 지리적으로도 가깝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전 세계 재외공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베이징 주중대한민국대사관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주중대사관이 지금은 사실상 대사 공석 상태나 마찬가지로 흘러가고 있다. 후임 김대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중국 정부의 아그레망(주재국 동의)까지 받았지만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임명 절차가 사실상 중단됐다. 김 전 비서실장의 부임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현 정재호 대사의 귀임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사실상 마음이 떠난 수장을 모시고 있는 대사관 직원들은 정 대사의 귀국만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가 언제 돌아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어차피 물러나는 것이 결정된 정 대사가 자신의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지적과 그동안 정 대사 심기경호에만 치중했던 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정신 없는 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만큼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베이징 관가에 퍼져 있다는 점이다. 감시하고 지적할 우두머리가 없어도 누군가는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야 할 시기다. 묻고 싶다. 주중대사관의 모든 직원들에게. “당신들은 작금의 상황에 관계없이 본인의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까.”
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한국 스타트업 투자에 붙은 '계엄' 꼬리표[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사내칼럼
2024.12.29 21:41:17
“한국은 끝장이 났습니다.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모두 실리콘밸리로 몰려들어 투자금을 받아내려 혈안인데 굳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에 투자할 벤처캐피털(VC)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계 스타트업이라는 꼬리표는 이제 ‘디메리트’입니다.” 12월 3일 계엄 다음 날 한 한국계 미국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고위 관계자가 전한 한탄 섞인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한인 송년 모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린카드(영주권)’에 관한 얘기가 진지하게 오갔다. “정치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주장에 일말의 설득력이 느껴져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인들의 반응에는 민망함마저 느껴졌다. “한국에 여행 갈 계획인데 어디가 좋으냐”며 들뜬 목소리로 묻거나, “최근 한국에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주기 바쁘던 이들이 “도대체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동안 농담 삼아 “한국은 위험천만한 후진국인 미국과 달리 밤새 밖을 걸어다녀도 안전한 나라”라며 현지인들을 놀려왔는데 이제는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 됐다. 미국 정부의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확인했다”는 말에도 속이 쓰리기만 하다. 회복이 필요할 만한 ‘손상’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탓이다. 한국은 8년 새 두 번의 대통령 탄핵소추를 겪었다. 21세기로 범위를 넓히면 세 번이다. 2000년대 들어 취임한 대통령 5명 중 3명이 탄핵에 휘말렸고 2명은 감옥에 갔으며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국가의 투자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토록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가 없어 보인다. 계엄령은 극단적 정쟁을 넘어서는 문제다. 외신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한다는 건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에서는 ‘해설’이 필요할 정도로 낯선 일이라는 방증이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위험 국가라는 인식을 안고 산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인식까지 갖게 됐다.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의 선결 과제다. 2024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서 냉전 시기 개발독재국가에서나 통용될 일이 일어났다. 이제 누가 한국 경제를 신뢰하겠는가. 경제적 타격은 이미 현실화했다. 환율 폭등으로 한국에 본사를 두거나 한국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물론 현지에 진출한 한국계 VC 역시 투자에 제약을 받으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현지 관계자는 “권한대행의 권한대행까지 이어지는 희대의 정치 상황 속에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더 추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출 기업들도 고환율을 반길 수 없는 처지다. 단기적으로 반도체·전자제품 등 완제품 가격경쟁력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공급망 타격이 더 아프다. 남한은 수입 없이는 내수도 돌아가지 않는 나라다. 고환율 지속에 체력이 약한 협력사가 하나둘 쓰러지면 대기업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환율은 시작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외 신뢰도 하락으로 인해 거래가 단절되고 신규 거래 창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현지 대기업 영업망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이제 테크 전 영역에서 한국산의 대체재가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메모리의 안정적 공급이 의심된다면 마이크론을, 디스플레이 수급이 불안하다면 BOE를 찾으면 된다. 미국은 물론 중국·대만·일본 경쟁사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해답은 하루빨리 정국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대선 유불리에 따라 말장난 수준의 정쟁을 벌이며 시간 낭비 중이다. 그 모습이 시시각각 외신을 통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며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고통과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다.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던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30년 전 일갈이 뼈저리게 와닿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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