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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월26일] 간송 전형필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25 17:10:49[오늘의 경제소사/1월26일] 간송 전형필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러는 바보라고 여겼다. 고서화며 도자기를 사들이는 데 10만석 재산을 쏟아 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간송(澗松) 전형필. 사재를 털어 문화재 해외유출을 막아낸 그는 국가와 후손에게 막대한 경제적ㆍ문화적 가치를 남겼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
[오늘의 경제소사] 알 카포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24 17:48:47풍요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 미국. 1차대전 특수를 누린 미국경제는 팽팽 돌아갔다. 주가와 치마단이 올라가기만 하던 시절, 밤은 그가 지배했다. 알폰소 가브리엘 카포네. 밤의 대통령 알카포네다. 알카포네라는 세균은 재즈로 상징되는 ‘광란의 시대’라는 적정온도에서 자랐다. 뉴욕 거리를 방황하던 불량소년이 급성장한 계기는 금주법. 1920년 금주법이 발효되자 21세의 알카포네는 시카고로 무대를 옮겨 밀주와 밀수 -
[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쿠빌라이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23 17:28:311260년 1월24일.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스스로 대칸(大汗)의 자리에 오른다. 형인 몽케칸이 남송과 전쟁에서 전사하자, 후계를 잇기 위해 선수를 친 것.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의 저항을 물리친 그는 1271년 대원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몽골제국의 정통성 계승을 둘러싼 싸움도 끝났다. 몽골의 5대 칸으로 원제국을 창립한 쿠빌라이칸(원세조)의 통치 아래 몽골은 전성기를 누렸다. 원세조는 화폐사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
[오늘의 경제소사/1월22일] 피의 일요일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21 16:18:011905년 1월22일(러시아력 1월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 광장. 일요일을 택한 15만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차르(황제)를 직접 면담하겠다며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요구사항은 하루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들은 황제를 믿었다.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성은(聖恩) 대신 총알이 날아왔다. 경찰과 군대의 무차별 사격에 흩어지는 시위대의 목덜미에는 코사크 기병대의 칼날이 꽂혔다. 사망자만 8 -
[오늘의 경제소사/1월21일] 루이 16세 처형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20 18:53:56[오늘의 경제소사/1월21일] 루이 16세 처형 유효투표 721표 중 무죄 334표, 유죄 387표. 53표 차이로 루이 16세의 반역혐의가 사실로 판정됐다. 프랑스 국민공회의 표결 이튿날인 1793년 1월21일, 루이 16세의 목이 잘렸다. 단두대에 선 루이 16세는 '내 피가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해주기를…'이라는 말을 남겨 일말의 동정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
[오늘의 경제소사/1월20일] 國共합작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9 19:10:16세계의 자본과 원자재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중국. 광활한 영토와 거대한 인구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체를 유지하는 단초는 8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대는 1924년 1월20일 열린 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회의. ‘연소(聯蘇)ㆍ용공(容共)ㆍ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강령 채택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중국의 통일과 근대화를 막는 군벌과 배후의 일본에 대항하자는 좌우동거는 3년반 만에 깨졌다. 좌파의 영향력 -
[오늘의 경제소사/1월19일] 제임스 와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8 16:51:46선박수리공의 아들이 세계사를 바꿨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얘기다. 1736년 1월19일 생(生), 1819년 몰(沒).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부근 그린오크에서 태어난 와트는 기계 틈에서 자라났다. 선박재료상과 수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이다. 런던에서 기계견습공을 마친 19세의 와트가 얻은 첫 직장이 글래스고 대학 공작실험실. 산업혁명의 불길이 여기서 솟았다. 발명과 혁신이 잇따르던 시대상황에서 와트는 증기기관에 -
[오늘의 경제소사/1월18일] 평화선 선포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7 16:33:51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해양주권선’을 선포한다.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의 주권선언’. 해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까지 바다에 대한 배타적 주권을 행사한다는 게 골자다. 일본이 즉각 반발하고 국제여론도 비난하고 나서자 이 대통령은 ‘한일간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며 이름을 ‘평화선’으로 바꿨다. 평화선 선포 목적은 일본에 대한 견제. 일본 어민의 대외 -
[오늘의 경제소사/1월17일] 原潛 노틸러스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6 17:29:591955년 1월17일,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첫 운항에 나섰다. 노틸러스호는 골프공 크기만한 우라늄 원료로 단숨에 9만6,558㎞를 달렸다. 디젤기관이었다면 3백만갤론의 연료가 필요한 거리다. 1958년에는 북극 바다 밑 종단 항해까지 성공리에 마쳤다. 1870년에 출간된 쥘 베른의 공상과학소설 ‘해저 2만리’가 현실화한 셈이다. 디젤엔진을 쓰는 재래식 잠수함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잠 -
[오늘의 경제소사/1월15일] 영일만 석유발견 소동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4 18:49:05건국 후 최대의 낭보가 터졌다. ‘영일만 석유 발견’ 소식이다. 1976년 1월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메가톤급 뉴스를 터뜨렸다. “영일만 부근에서 원유와 가스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흥분과 열광에 파묻혔다. 기대가 소문을 낳고 소문은 사실처럼 퍼졌다. ‘선진국 진입’은 물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고 있다’는 식의 장밋빛 전망이 꼬리를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경제성 여부는 더 -
[오늘의 경제소사/1월14일] 긴급조치 3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3 18:28:26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1973년 10월 발발한 4차 중동전 이후 아랍권의 석유무기화로 전세계가 휘청거리자 한국경제는 늪으로 빠져든다. 석 달 사이에 4배나 뛴 원유가격이 악순환의 시발점. 화력발전의 단가 상승으로 전기 값부터 올랐다. 공산품도 뛰었다. 비료와 농약 가격 인상으로 쌀 값도 올라갔다. 1974년 도매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44.6%. 한국전쟁 이후 최고치다. 파동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기름을 구하지 못해 -
[오늘의 경제소사/1월13일] 1차 5개년 계획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2 18:49:36[오늘의 경제소사/1월13일] 1차 5개년 계획 경제개발의 시동이 걸렸다. 1962년 1월13일, 한국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중장기 경제비전을 제시한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이다. 개발독재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역량은 경제에 집중됐다. 1차 목표는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과 산업화. 해외에 내팔 것이라고는 텅스텐과 해산물이 고작이었던 -
[오늘의 경제소사/1월12일] '최고의 재무장관'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1 19:10:56[오늘의 경제소사/1월12일] '최고의 재무장관' 허드슨 강마저 숨을 멈춘 것 같았다. 팽팽한 긴장도 잠시, 부통령 애런 버(Aaron Burr)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쓰러진 그는 이튿날인 1804년 1월12일 숨을 거뒀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최후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그의 일생은 극적이다. 서인도제도의 -
[오늘의 경제소사/1월11일] 마호메트 메카 입성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10 18:54:23[오늘의 경제소사/1월11일] 마호메트 메카 입성 631년 1월11일, 성지 메카의 성문이 열렸다. 예언자 마호메트(Mahomat)가 돌아온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장의 계시를 받고 포교에 나선 지 21년, 박해를 피해 72명의 신도와 함께 고향 메카를 탈출(622년:이슬람력 헤지라 원년)한 지 9년 만이다. 무혈 입성한 예언자 마호메트는 360개의 우상을 부수 -
[오늘의 경제소사/1월10일] 최초의 지하철
오피니언 사내칼럼 2005.01.09 18:59:541863년 1월10일 오전6시 영국 런던 패딩턴역. ‘매진이요, 매진!’ 역무원의 외침에도 4,000여명의 군중이 몰려 들었다. 승객을 가득 태운 열차는 파링턴까지 6㎞ 구간을 단숨에 달렸다.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된 순간이다. 증기기관이 내뿜는 매연에도 지하철은 첫해에만 890만명의 승객을 날랐다. 1868년 2호선이 완공되는 등 런던 지하철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1880년엔 4,000만명이 넘는 승객이 지하철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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