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혼자 살겠다고 줄행랑 친 아버지
스웨덴 영화 ‘포스 마쥬어:화이트 베케이션’은 휴가 중 눈사태와 동시에 도망가는 아버지를 목도한, 겁에 질린 가족에 대한 아주 고약한 이야기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금융사 직원 토마스(요하네스 바 쿤게)는 모처럼 짬을 내 아내 에바(리사 로벤 콩슬리)와 두 자녀를 데리고 스키 리조트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사달은 둘째 날 점심 야외식당에서 벌어진다. 갑자기 저 멀리 슬로프가 조금씩 무너져 내려오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겁에 질려 “어떡해, 아빠 눈사태야!”라고 외친다. 그런데도 아빠는 “눈사태가 아니라 스키장에서 연출한 거야, 기술자들이 알아서 할거야, 괜찮아”라며 태연하다. 하지만 눈 더미는 끝내 모두를 덮치고 사방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위기의 순간에 혼자 도망가 버린다.
#용서 못할 비겁한 남편, 무책임한 아빠
다행히 눈사태가 아니라 눈 먼지였다. 눈 먼지가 가라앉은 뒤 토마스는 제 자리로 돌아와 앉지만 분위기는 이미 냉랭하다. 아내도, 꼬맹이 딸과 아들도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비겁한 남편, 무책임한 아빠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걸 시위라도 하듯이.
그런데도 토마스는 사과가 없다. 참다못한 에바는 “이 사람은 겁먹어서 우릴 두고 도망갔다”고 지인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래도 토마스는 “안 그랬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심지어 “서로가 다르게 기억할 뿐인데 너무 심하게 굴지 말라”면서 불만까지 표시한다. 이에 격분한 에바가 줄행랑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내민다. 그제서야 토마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
가족을 책임져야 할 리더가 위기 상황에 홀로 도망을 치다니, 토마스의 무책임은 용인받기 어렵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昏庸無道’
우리는 현실에서도 국가 리더의 무책임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최근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혼용무도는 어리석은 혼군(昏君)과 무능한 용군(庸君) 탓에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이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그런 측면이 있었다. 정부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 대책없이 우왕좌왕했고, 가계부채·청년실업·주택난 등 경제문제에서도 철저하게 무능했다.
더 큰 문제는 국가 운용의 실패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국회에, 여당은 야당에, 야당은 여당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을 경제 위기 속에 팽겨쳐놓은 채 서로 ‘네 탓’공방만 일삼는 꼴이 영화 속 토마스와 어쩌면 그리도 꼭 닮았는지….
#새 출발은 진정한 참회에서 가능
그래도 토마스는 영화에서 아버지로서 원초적인 공포에 굴복했던 잘못을 참회하며 오열한다. 더 이상 살아갈 명분도 의욕도 잃은 사람처럼 뉘우치고 또 뉘우친다.
하지만 우리 위정자들에게선 참회의 기색이 없다.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OECD 회원국 기준), 행복지수는 아프리카 국가들 수준인 118위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지도자의 자책을 언제나 볼 수 있을지, 올해도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절망에 섞인 신조어들이 쏟아지건만 그저 ‘네 탓’ 뿐이다. 경제가 위기에 처한 지금은 무엇보다 진심 어린 국가 지도자의 뉘우침이 절실하다. 참회가 있어야 변화도 새 출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궤변으로 무책임을 정당화 못해
영화에서 토마스의 친구 매츠(크리스토퍼 히뷰)가 토마스를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내뱉는다. “극도의 위험에 처하면 우리 안의 생존본능이 깨어나게 돼 있어. 앞뒤 안 재고 탈출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이야…에스토니아 선박사고 때도 850명이 죽었고 생존자가 137명이었잖아.” 설마 사람의 본성이 그럴 리야 있겠는가. 그런 궤변으로 무책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여하튼 불가항력이란 뜻을 지닌 ‘포스 마쥬어’라는 이름의 이 영화는 무슨 이유에선지 개봉된 그 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영화상 등에서 큰 관심을 받았고,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의해 ‘올해 최고의 영화’로까지 선정됐다. /문성진기자 hnsj@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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