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훈(21)이 연장에서 터뜨린 15m짜리 버디 퍼트는 그의 골프인생 자체인 것 같았다. 이제 스무살을 넘겼을 뿐인데 왕정훈은 먼 길을 돌아왔다. 중학생 때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건너가 6년간 아마추어 3승을 거둔 그는 지난 2012년부터는 중국프로골프 투어를 뛰었다. 그해 상금왕에 올랐고 2013년부터는 중국 투어와 아시안 투어를 병행했다. 필리핀을 택한 것은 물가가 싸다는 게 큰 이유였고 중국 투어는 나이 제한이 없어 도전한 것이라고 한다.
‘골프 노마드’ 왕정훈은 9일(한국시간) 모로코 라바트의 로열골프 다르에스살람(파72·7,487야드)에서 열린 유럽프로골프 투어 하산 2세 트로피에서 우승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다음으로 치는 유럽 투어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기는 지난달 이수민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역대로는 여덟 번째. 왕정훈은 올 시즌 유럽 투어 최연소(만 20세256일) 우승기록도 썼다.
선두에 1타 뒤졌던 왕정훈은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5m 버디를 넣어 5언더파의 나초 엘비라(스페인)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왕정훈은 같은 홀에서 벌인 1차 연장에서 15m 버디 퍼트를 넣어버렸다. 잘해야 파에 그칠 것 같던 상황에서 버디가 나오자 엘비라는 2온 2퍼트 버디를 해놓고도 흔들렸다. 같은 홀 2차 연장에서 티샷이 왼쪽으로 감겼다. 3온은 했지만 버디는 어려워 보였다. 반면 왕정훈은 6m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포효했다. 18번홀에서 세 번의 중장거리 버디를 모두 넣으며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우승상금 25만유로(약 3억3,000만원)를 탄 왕정훈은 “연장에서 심리적으로 불안했지만 ‘기회는 계속 오니까 순위에 얽매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던 아버지 말씀이 기억나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세계랭킹 133위였던 왕정훈은 국내 골프팬들에게는 무명에 가까운 선수다. 아시안 투어 두바이 오픈에서 준우승하고 중국 투어 미션힐스 하이커우에서 우승한 2014년부터 그나마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는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에도 3차례 출전해 2개 대회에서 공동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도 KPGA 투어 대회에 나갈 예정이었으나 스폰서 초청으로 유럽 대회 출전자격을 얻었다. 이번 우승으로 2018시즌까지 유효한 유럽 투어 출전권을 얻은 왕정훈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동아프리카 모리셔스로 이동해 오는 12일부터 열리는 유럽 투어 모리셔스 오픈에 출전한다. 이날로 세계랭킹이 88위까지 뛴 왕정훈은 올림픽 출전도 노릴 만하다. 한국에 주어지는 출전권은 2장인데 왕정훈은 한국 선수 가운데 세계랭킹이 네 번째로 높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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