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한참 전에 끝났고 혼자서 객석에 남은 사람도 있을 리 없다. 오거스타내셔널은 곧 휴장에 들어가 정적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2025년 마스터스의 이야기는 내년 대회가 오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참을 끊임없이 회자할 것이다.
로리 매킬로이는 커리어 그랜드슬램 요건에 마스터스 우승만을 남긴 뒤로 11번째 도전 만에 4대 메이저 대회 석권을 이뤘다. 역대 6번째이면서 21세기 최초의 커리어 그랜드슬램, 그리고 2000년 타이거 우즈 이후 25년 만의 기록.
우즈 시대가 저물고 있는 시점에 우즈가 인정한 후계자가 그의 뒤를 이어 골프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95명으로 시작해 선택 받은 마지막 1인을 남기기까지 제89회 마스터스 ‘직관기’를 온라인에 옮긴다.
DAY1_ 인디언 서머
아침 7시 25분. 여느 때처럼 올해 마스터스도 3명의 시타로 출발을 알렸다. 명예 시타자는 2022년부터 변함없이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 톰 왓슨.
85세의 니클라우스는 두 번 박수를 받았다. 티를 꽂으면서 한 번, 티샷 뒤 또 한 번. 허리를 굽혀 티를 꽂는 게 어쩌면 티샷보다 더 어려운 나이다. 오랜 과정을 거쳐 시타를 마친 니클라우스는 1986년 6번째 마스터스 우승 때처럼 만세를 불렀다.
첫날 경기의 테마는 ‘인디언 서머’였다. 북미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 1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현상. 인디언들은 이 시기를 신의 축복으로 여겼다고 한다. 만년에 찾아오는 짧지만 강렬한 행복을 뜻하기도 한다.
45세의 저스틴 로즈가 버디 8개와 보기 1개의 7언더파 불꽃을 일으켜 3타 차 선두로 치고 나갔다. 디펜딩 챔피언 스코티 셰플러도 4언더파 공동 2위로 출발이 좋았다.
마스터스 20번째 출전인 로즈는 출전 사상 커리어 베스트를 찍었다. 지난 한 해 PGA 투어에서 아마추어 신분으로 1승, 프로 전향 후 1승이라는 최초 기록을 쓴 영건 닉 던랩이 90타를 친 날, 선수 생활의 황혼을 바라보는 로즈는 그보다 25타를 덜 쳤다. “혼자서 ‘버블’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쳤어요.”
지난해 로즈는 커리어에 있어 인디언 서머를 보내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마스터스에선 컷 탈락했지만 디 오픈에서 공동 2위, PGA 챔피언십에서 공동 6위에 올랐던 그다.
인디언 서머는 매우 짧다. 이를 잘 아는 로즈는 “나는 45세이고 골프는 앞으로 점점 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기회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왔을 때 잘 살려야 한다”고 했다.
매킬로이는 인터뷰를 하지 않고 코스를 빠져나갔다. 그럴 만했다. 14번 홀까지 버디만 4개를 챙겨 기분 좋게 첫 단추를 끼울 것 같던 그는 550야드짜리 파5 홀인 15번에서 재앙을 맞았다. 두 번째 샷까진 좋았다. 294야드 티샷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떨어졌고 핀까지 241야드를 남기고 친 두 번째 샷은 그린을 넘어가 러프로 갔지만 위험한 지역은 아니었다. 짧아서 그린 앞 물에 빠뜨리는 것보다 나았다.
세 번째 샷이 난데없이 물로 가버렸다. 웨지 샷을 다소 강하게 치기는 했어도 물까지 갈 정도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첫 번째 바운스 뒤 속도는 줄지 않았고 핀을 지나서는 오히려 빨라져 물로 빨려 들어갔다. 드롭존에서 친 다섯 번째 샷도 썩 날카롭지 않아 결국 2퍼트 더블 보기를 적었다. 2언더파로 내려간 매킬로이는 17번 홀(파4)에서 3온 3퍼트로 또 더블 보기를 범해 이븐파 공동 27위까지 미끄러졌다.
15번 홀은 그린 표면을 교체한 네 곳 중 하나다. 새로운 그린 표면은 기존보다 딱딱하기 마련. 이전 그린이라면 매킬로이의 두 번째 샷이 러프까지 안 갔을지 모른다. 세 번째 샷이 물까지 가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진 사라센이 1935년 앨버트로스(기준 타수보다 3타 적은 타수로 홀아웃)를 터뜨린 홀이 바로 15번이다. 사라센은 그해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마스터스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건 사라센뿐인데 매킬로이의 첫날 순위를 보면 올해도 사라센의 유일한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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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2_ 랑거의 작별인사
전날 90타를 친 던랩은 2라운드에 71타를 쳤다. 그는 “모든 것을 쏟아낸 끝에 언더파를 기록했다”고 했다. 하지만 첫날보다 19타를 덜 친 대반전에도 결과는 합계 17오버파 95위 꼴찌로 컷 탈락.
던랩은 집에 갔지만 매킬로이는 이글 1개와 버디 4개로 6언더파 66타를 치는 반전에 2타 차 공동 3위까지 올라갔다. 후반 첫 6개 홀에서 5타나 줄였다. 꺼질 것 같던 불씨가 살아나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13번 홀(파5) 이글에 페이트런(관람객)들의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티샷을 약간 오른쪽으로 잘못 보내고 “아”하며 탄식한 매킬로이는 절묘한 두 번째 샷으로 실수를 덮었다. 핀까지 215야드. 볼이 놓인 곳이 페어웨이도 아니어서 그린 앞 개울이 더 부담스러웠지만 매킬로이는 고민 끝에 4번 아이언을 들었다. 탄도를 낮게 조절한 샷은 핀 2m 안쪽에 예쁘게 멈춰 섰다.
전날 더블 보기를 했던 15번과 17번 홀에서는 각각 버디와 파. “어제도 좋은 골프를 했다. 다만 2개의 좋지 않은 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 매킬로이는 “이제 반이 끝났을 뿐”이라고 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오거스타내셔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니 티샷을 페어웨이에 보내고 두 번째 샷으로 기회를 만드는 일만 생각해야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훨씬 더 피곤하게 만드는 코스여서 평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자야 합니다.”
로즈는 1타밖에 줄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8언더파 선두 자리를 지켰다. 브라이슨 디섐보가 첫날 3타, 이날 4타를 줄여 7언더파 2위에 이름을 올렸고 셰플러는 5언더파 공동 5위에 자리했다.
컷 통과 기준은 2오버파. 68세 베른하르트 랑거는 1타 차, 66세 프레드 커플스는 2타 차, 마스터스 세 차례 우승과 대회 통산 상금 1위(약 984만 달러)의 55세 필 미컬슨은 3타 차이로 컷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랑거는 41번째 출전인 올해를 끝으로 마스터스와 작별했다. 시니어 무대의 여전한 제왕이지만 “코스는 길어지는데 내 샷 거리는 짧아진다. 한창때인 선수들이 9번 아이언을 들 때 나는 하이브리드 클럽을 잡는다”며 “여기서 더는 경쟁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고 했다.
“골프는 깨지기 쉽고 변덕스러운 것, 잡히는가 하면 또 달아나는 주식시장 같은 것”이라고 한 랑거는 “메이저 우승자라 할지라도 2년쯤 지나면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 게 이 바닥이다. 나는 그저 신의 은총을 받은 것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높아지고 나아질수록 더 어려워지는 법이에요. 포기하는 순간 당신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1000명은 줄을 선다는 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빨간 셔츠의 원조는 타이거 우즈 당신이 아니고 바로 나’라고 우즈를 놀리고는 했다”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랑거는 1985년 마스터스 파이널 라운드에 위아래 빨간 옷을 입고 우승했다(1993년 마스터스 두 번째 우승 때는 빨간 옷이 아니었다).
작별 기념으로 올해 1라운드에도 ‘올 레드’로 맞춰 입은 랑거의 플레이를 14번 홀에서 잠시 지켜봤다. 티샷 뒤 페어웨이를 걸어나가는 그에게 관람객들의 기립 박수가 잔잔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해졌고 랑거는 관람석의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박수로 역시 경의를 표했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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