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부터 뮤지컬·게임·캐릭터 등 이른바 ‘문화’ 산업으로 불리는 분야의 성공 열쇠는 팬덤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대중은 그저 즐길 뿐이지만 팬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기 때문이다. 달갑든, 달갑지 않든 간에 팬덤을 품고 관리하는 것이 해당 분야 종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된 이유다.
◇‘사재기’부터 ‘조공’까지, 기상천외한 팬덤의 소비학=음원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세계 음악 시장 구조가 재편되며 음반 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막상 국내 음반 판매량은 큰 감소 폭 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강력한 팬덤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 가수의 음반이 여전히 잘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음반 판매량이 인기 아이돌을 증명하는 척도로 여겨지면서 팬들의 음반 사재기는 도리어 가속화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일례로 인기 그룹 엑소(EXO)의 경우 지난해 3월 정규 2집 앨범 ‘엑소더스’를 구성물과 표지 디자인에 따라 10종으로 구분한 후 그 10종의 음반을 또 한국어와 중국어 버전으로 나눠 총 20종의 버전으로 출시했다. 꽤 많은 열성 팬들이 20개의 앨범을 다 샀다. 그렇게 불과 이틀 만에 45만장의 음반을 판매한 엑소는 약 2개월 뒤 4곡의 신곡을 더한 리패키지 앨범을 발매, 이번에도 첫날 37만장을 팔아치워 결국 총 112만장의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선망하는 스타에게 여러 선물을 안기는 ‘조공’도 팬덤 경제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현상이다. ‘조공’은 주로 인기 연예인의 팬덤에서 이뤄진다. 따지고 보면 과거 손편지를 쓰고 종이학을 접어 보내던 것과 매한가지지만 ‘조공’은 선물하는 상품의 가격이나 규모가 비교 안 될 정도로 크고 방식도 다채롭다. 좋아하는 스타의 생일을 맞아 팬클럽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금해 명품 가방이나 신발·노트북 등의 고가품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고 지하철 광고판이나 버스에 생일 축하 광고를 싣는 경우도 많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런 광고를 집행하는 데 적게는 한 달에 30만원부터 많게는 250만~300만원까지 들지만 서울 명동역이나 신촌 등 주요 역사에 광고를 해달라는 팬들의 문의가 끊임없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 밖에도 팬들은 좋아하는 스타가 좀 더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나 공연 관계자들을 향해 도시락이나 기념품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스타의 이름으로 통 큰 기부를 행사하기도 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서울 곳곳에 ‘동방신기숲’ ‘아이유숲’ ‘신화숲’ 등이 조성됐고 ‘박유천 도서관’은 전국에 벌써 세 곳이 문을 열었다. 기부용 쌀 화환 업체의 빼놓을 수 없는 큰손도 수많은 연예인의 팬덤이다.
◇먹거리·관광·소비재 등 전 방위로 펼쳐지는 팬덤 경제=팬덤의 영향력이 그저 문화콘텐츠 분야에 국한된다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팬덤 소비의 가장 큰 특징은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비용이 얼마가 드느냐를 따지기보다 좋아하는 스타의 행복이나 기쁨, 자기만족 같은 무형의 가치에 좀 더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팬덤의 이 같은 강력하고 가치 추구적 소비 행태를 잘 아는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전 방위적 팬덤 마케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례로 ‘소녀시대’ ‘샤이니’ ‘엑소’ 등이 소속된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012년 자회사를 통해 여행업에 진출했는데 주력 상품이 K팝 공연을 관람하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여행패키지다. 예컨대 ‘샤이니’가 도쿄돔 공연을 할 경우 공연 티켓과 항공권, 공연장과 가까운 호텔의 숙박을 판매하는 식이다. 지난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SM타운도 국내외 팬덤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소속 아이돌들이 받았던 교육이나 메이크업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홀로그램 콘서트 등을 즐길 수 있다. 스타 얼굴 등이 인쇄된 쿠션이나 티셔츠 등도 판매하는데 통상의 다른 상품과 비교해 2~3배 가까이 비싼 가격에도 팬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올 3월에는 이마트와 협력해 ‘엑소라면’ ‘소녀시대 팝콘’ 등의 상품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출시 약 2개월 만에 100만개 이상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팬덤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데 단순히 선물을 보내고 응원하는 것을 넘어 이제 내가 보고 싶은 스타와 문화콘텐츠를 키우기 위해 직접 투자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히티와 라붐·스텔라·나인뮤지스는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것 외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더 있다. 지난해 말 문을 연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메이크스타’를 통해 팬들로부터 앨범 혹은 화보집 제작비를 모금했다는 점이다. 라붐과 타히티·스텔라가 진행한 앨범 제작 프로젝트는 각각 2,177만원, 3,369만원, 4,218만원을 모아 모두 목표액 1,000만원을 훌쩍 넘겼다. 나인뮤지스는 고품질의 화보집 제작을 목표로 모금을 시작해 목표액 3,500만원을 260% 초과 달성한 9,140만원을 펀딩 받는 데 성공했다. 팬들은 후원 금액에 따라 앨범에 명예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거나 기념품을 제공 받고 많은 금액을 낼 경우 스타와의 만남 기회를 얻는 경우도 있다. 회사 측은 “일반적으로 보면 팬들은 좋아하는 스타의 작업에 참여했다는 보람과 추억을 얻고 기획사는 고품질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제작 여건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날의 검’ 팬덤, 지나친 이용은 자제해야=기업 입장에서 팬덤 마케팅을 활용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나 상품과 관련된 매출을 높일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지나칠 경우 독이 될 수도 있다. 팬덤에만 매달리다가는 문화콘텐츠산업의 본질인 작품의 내용과 질을 챙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내 뮤지컬 시장은 일명 ‘회전문 관객’이라 불리는 팬들의 지지 아래 지난 5년간 연평균 19.1%의 성장률을 보일 정도로 고속 성장했지만 그만큼 캐스팅이나 작품 구성의 측면에서 골수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실제 가수 ‘이수’의 경우 뮤지컬 ‘모차르트’에 캐스팅이 확정됐지만 뮤지컬 열성 팬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끝내 하차하기도 했다.
팬덤의 본질이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는 만큼 팬들의 미움을 살 경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위험도 크다. 팬을 향한 불성실한 태도가 문제가 된 아이돌 가수가 결국 그룹을 탈퇴하고 팬들이 선물해준 티셔츠를 입고 비밀 데이트하는 장면이 들킨 연예인이 크게 논란이 되는 것은 그런 연유다. 기업들의 지나친 팬덤 마케팅도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한 아이돌 그룹의 팬이라는 직장인 박모씨는 “음반을 대량 구매할 경우에만 당첨될 수 있는 사인회를 진행한다거나 고액의 후원을 한 사람에게만 팬미팅 기회를 주는 등의 지나친 상술은 나를 정말 인간 ATM기로 보는 것 같아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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