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온전한 내 편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여.” 영화 ‘계춘할망’에서 최고의 대사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계춘(윤여정)의 이 말을 꼽겠다. 12년 만에 다시 만난 손녀 혜지(김고은)와 나란히 바닷가에 앉아 이 말을 건네며 “이제 나가 니 편이 되어줄테니 너는 니 하고 싶은대로 허고 살어라”며 다독이는 계춘은 모습은 다시 떠올려도 애틋하다.
#“세상에 내 편 하나만…”
7살짜리 혜지를 잃고 계춘이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매고 미아 찾기 전단을 뿌리며 손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 무려 12년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하던 손녀가 시장 통에서 사라졌던 그 순간을 계춘은 한시도 잊을 수 없다. 그런 계춘의 모습을 지켜보다 못해 주위에서는 “그만큼 기다렸으면 이제 되지 않았냐”고 아무리 말해도 그녀는 기다리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계춘이 집을 팔라는 주변의 성화를 단칼에 내치는 것도 혜지 때문이다. 그녀가 사는 제주도는 중국인 투자가 몰리면서 땅값이 크게 올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집과 땅을 팔고 목돈을 챙기는 상황. 부동산업자는 뻔질나게 계춘의 집에 드나들면서 “이제 그만 집을 파세요 할망, 내가 두 배 쳐 드릴게요”라며 매달린다. 그래도 계춘은 요지부동. “집을 팔아버리면 혜지가 어디로 돌아오라고….” 계춘은 혜지가 없다면 땅값 상승도 돈벼락도 시큰둥할 뿐이다.
#제주 땅값 상승률 전국최고
영화 밖 현실에서도 제주도의 땅값 상승은 장난이 아니다. 국토교통부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1일 기준으로 산정한 제주도 토지의 개별공시지가는 작년 대비 27.7%나 올라 전국 평균 상승률 5%를 크게 웃돌았다.
중국인들은 제주도 땅 투자는 마구잡이 식이다. 중국인이 소유한 제주도 땅이 2011년 142만㎡에서 2014년 834㎡로 3년만에 6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중국인의 땅 장사는 제주를 넘어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중국의 뤼디(綠地)그룹이 최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외국인 아파트 부지 매입에 나선 것을 비롯해 인천과 여수 등지에서도 중국 자본의 부동산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계춘의 통장을 훔쳐…
해외에서도 중국인의 땅 장사는 열기를 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10년 이후 5년간 1,180억달러에 달했던 중국 투자자의 부동산 매입이 향후 5년간 2,180억달러로 두 배에 달할 전망이다. 호주에서는 지난해 중국인 부동산 투자 승인 규모가 240억 호주달러로 1년새 두배로 늘었다. 캐나다 밴쿠버의 경우 지난해 차이나머니의 부동산 투자액이 127억 캐나다달러로 전체의 33%를 차지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중국인의 땅 장사는 장기침체에 빠진 글로벌 경제에 돈이 돌게 함으로써 경기를 부양시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늘 또한 짙다. 예컨대 뉴질랜드에서는 지난해 수도 오클랜드의 전체 주택 가운데 40%가 중국식 성씨를 가진 사람이 보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국민들의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제주도에서의 중국인 땅 장사에 대해서도 우려의 시선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중국인의 제주도 부동산 투자 열기가 마치 1970년대 일본인이 하와이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정책당국에서 중국인의 제주도 부동산 투자의 실효 여부를 잘 따져 대응할 필요가 있다.
#좋은 사람이 많은 세상
영화 속에는 제주도 땅값을 둘러싼 탐욕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혜지와 어두운 생활을 함께 했던 불량청소년 철헌(류준열)은 제주에 있는 혜지에게 큰돈을 구해내라고 협박한다. 제주까지 내려와 혜지 주변을 맴도는 정체불명의 남성도 계춘의 통장을 훔쳐내오라고 강요한다. 두 무뢰한 모두 중국인의 투자 열기로 급등한 제주도의 땅값과 계춘의 목돈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래도 ‘계춘할망’은 훈훈한 영화다.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 손녀의 배신과 보은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가만 따라가다 보면 요즘 세상이 험악하긴 해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 많고 살만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리고 “세상에 온전한 내 편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여”라는 계춘할망의 말이 맴돌면서 “나는 내 가족에게 온전한 ‘내 편’이 되고 있는가?” 자꾸만 스스로 묻게 된다. /문성진기자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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