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듯 날아오는 총탄 속에서 전술적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를 사수한다는 결심과 각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전투는 1만4,389명의 중공군이 사망했고 아군 3,416명이 전사했다.”(6.25전쟁 당시 참전 용사의 자서전 중 일부 발췌)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매년 6월 언저리만 되면 가슴이 시려 오는 사람들이 있다. 벌써 6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가족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며, 가족을 지키겠다며 분연히 일어서 전쟁터로 나간 수많은 젊은이들은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숫자만 13만여 위가 넘는다.
그들을 국가와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지난 2000년부터 육군 주도로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 시작됐다. 지난해까지 16년 동안 우리 군이 다시 찾은 ‘젊은이’들의 유해는 약 9,000여 위. 아직도 12만여 위가 어딘지 모를 한반도 산야에 잠들어 있다.
그들을 찾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발굴병들은 오늘도 산을 오른다.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체력의 극한을 맛보지만 ‘선배를 가족과 조국 품으로 다시 돌려주겠다’는 자부심만은 가득하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강원도 홍천에서 진행됐던 유해발굴 현장에 동행했다.
▲오전 7시 30분 ~ 9시
이른 아침 채 이슬이 마르기도 전인 오전 7시 30분. 강원도 홍천의 사오랑고개 부근에 국유단 단원들과 육군 11사단 100명의 발굴 인원들이 1,000m가 넘는 산을 오른다. 한 손에는 흙을 파는 데에 필요한 삽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점심 때 먹을 전투식량을 들고 산을 오른다. 발굴을 담당하는 국유단 장병들은 발굴에 필요한 장비 때문에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삽, 호미, 트롤(호미보다 미세한 발굴 도구), 발굴용 붓 등 각종 장비는 물론 발굴 후 현장을 남기기 위한 카메라, 수습된 유해를 감식소로 보내는 데 필요한 오동나무 관까지 짊어지고 산에 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되풀이되는 일정이지만 누구 하나 불평은 없다. 발굴에 참여한 국유단 방보인 상병은 “우리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발굴에 임한다”며 “한 분 한 분 수습을 할 때마다 느끼는 감동 때문에 다른 장병들도 힘든 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9시~ 12시
경사가 40도를 훌쩍 넘는 등산을 마치고 난 후, 잠시 쉴 시간도 없이 발굴이 시작된다. 30분이 넘는 등산을 하고 난 후 이어지는 발굴이라 힘들 만도 할 텐데, 묵묵히 유해가 있을 것으로 예측된 곳을 삽으로 굴토하기 시작한다. 발굴에 참여한 육군 11사단 김모 상병은 “발굴이 주로 산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빨리 굴토를 하지 않고는 하산 시간에 걸려 제대로 된 발굴을 할 수 없다”고 더욱 분주히 손을 놀린다.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국유단의 안순찬 원사는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을 꼼꼼히 굴토를 해야 한 분이라도 더 수습할 수 있다”며 “실제로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니만큼 더 주의 깊게 발굴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전 12시 ~ 오후 1시
오전 발굴의 끝은 꿀맛 같은 점심시간이다. 장병들이 주로 먹는 식단은 장소에 관계없이 취식이 가능한 전투식량이다. 일반 병사들은 중요한 훈련이나 멀리 파견을 나갔을 때만 접할 수 있는 전투식량이지만 국유단 단원들에게는 일상적인 식단이다. 훈련소를 막 마치고 발굴팀에 합류한 지 3일 됐다는 김동규 이병은 “처음 먹어보는 식단이라 맛있다”며 “앞으로 계속 이 식단만 먹을 생각을 하면 걱정이 들긴 하지만 괜찮다”며 웃는다.
▲오후 1시 ~ 4시
꿀맛 같은 점심 시간을 뒤로 하고 다시 발굴을 위한 굴토를 시작한다. 그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유단 발굴병 무전기를 통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발굴팀장님, 유해 한 구가 1080번 개인호에서 식별됐습니다.”
이 한 마디와 함께 국유단 발굴병들의 표정은 달라진다. 유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수습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다. 국유단의 방 상병은 “유가족의 DNA와 유해에서 검출되는 DNA가 일치해야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며 “우리가 발굴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해 DNA를 검출할 수 없게 되거나 훼손시킨다면 어떻게 돌아가신 분들을 뵐 수 있겠어요?”라며 급히 발굴을 위해 유해 발견 지점으로 뛰어갔다.
방 상병의 말처럼 국유단 발굴병들은 항상 긴 팔에 수술용 마스크, 장갑을 착용하고 유해를 발굴한다. 더운 날씨에 그 장비들을 다 차고 발굴을 하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국유단 발굴병들은 연신 땀을 닦아내며 참아낸다. 숭고한 일이니만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오후 4시 ~ 9시
산에서의 발굴 작업은 생각보다 짧다. 해가 지기 전에 활동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유해발굴은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마무리된다. 발굴이 마무리되고 수습이 완료되면 수습된 전사자들을 위한 약식제례가 이어진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경례가 이뤄지면 오동나무 관에 유해를 담고 현지 부대가 마련한 임시 봉안소에 유해를 모신다. 이곳에서 잠시 머무른 유해는 국유단 내부에 있는 유해 감식소로 보내진다. 그렇게 유해는 감식소로 보내져 성별과 연령, 국적 등 다양하게 정밀 감식 작업이 이뤄진다.
하지만 발굴병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이날 발굴을 완료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다음 날의 발굴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유단은 ‘KIATIS’라는 독자적인 유해 기록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발굴된 모든 유해를 이곳에 기록하고 데이터를 축적해 모든 유해에 대한 정확한 위치와 정보를 상시 검색해볼 수 있다. 이 일 또한 컴퓨터로 일일히 유해를 그려넣고 과정을 기록해야 하는데, 보통 한 유해당 30~40분 이상 걸리는 복잡한 작업이다. 기록이 끝나면 발굴병은 그날 썼던 발굴장비를 세척하고 건조시킨다. 그래야만 다음 날의 발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굴팀장 안 원사는 “매일 이렇듯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발굴병이 무엇 때문에 힘든 과정을 참아내고 있는지 우리 국민들이 알아 주셨으면 한다”며 “6월에만 집중되는 관심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찾는 꾸준한 국가적인 노력과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며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홍천(강원도)=글·사진·영상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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