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 5월 ‘불펜투수론’을 꺼내며 대권 도전을 시사한 바 있다. 안 지사는 당시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불펜투수로서 몸을 푸는 단계”라며 “시대의 요청이 있을 때 부응하지 못하는 건 장수의 가장 큰 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정치인들은 시대의 요청이 있을 때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안희정 지사가 거론한 ‘불펜투수’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등판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선발투수가 내려간 뒤에 등판한다는 사실보다는 언제든 준비돼 있어야 하는 장수의 마음가짐에 방점이 찍힌 셈이다. 그는 지난 6월 “불펜투수론은 특정 후보의 대체재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대선 출마시기와 관련해선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요구하는 시대 상황, 각 당의 상황이 결정의 주요한 축”이라면서도 “또 하나의 축은 저의 의지와 준비된 실력 정도”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스스로 확신이 설 때 도전하겠다”고 밝힌 안희정 지사는 어떤 준비가 돼 있어야 본인의 등판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까. 훌륭한 불펜투수의 조건을 통해 안 지사의 등판 가능성을 점쳐봤다.
훌륭한 불펜투수는 A급 구종 한 가지 이상을 구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 중인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은 ‘돌직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승환의 직구에 ‘돌직구’라는 이름이 붙은 건 공이 묵직해 타자들이 직구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승환이 던지는 직구의 구종가치는 40이닝 이상 던진 메이저리그 투수 274명 중에서도 22위(7일 팬그래프 기준)에 오를 정도로 높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서 세이브 부문 1위를 기록 중인 김세현(넥센) 역시 150km를 넘나드는 직구가 주무기다.
최근 안희정 지사는 지방분권과 환경·농업 등 국가 과제로 설정 가능한 정책들을 제시하며 구종을 갈고 닦고 있다. ‘지방분권형 개헌’의 옹호론자인 안 지사는 내달 6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초대해 지방분권을 위한 토론회를 연다. 사회 문제로 급부상한 미세먼지와 관련해서는 “석탄 화력의 전력 부담률을 낮추는 대신 ‘클린 화력’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안희정표 미세먼지 종합 대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연말에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안 지사의 이러한 행보는 정책이라는 A급 구종으로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안희정은 야권에서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중앙정치 경험이 적은 편이지만, 자신의 도정 경험을 살린 A급 구종은 충분히 강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불펜투수는 선발투수보다 구속이 빠르다. 긴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선발투수는 80% 정도의 힘으로 공을 던져 투구 페이스를 조절하지만, 비교적 짧은 이닝을 책임지는 불펜투수는 전력투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 연말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기로 밝힌 안희정 지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80%로 공을 던질 때, 안 지사는 ‘불펜투수’를 자임해 전력투구를 하는 길을 택했다. 안희정 지사가 어떻게 본인의 강점을 살리며 페이스를 끌어올릴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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