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의 뿌리예요. 기록이 없다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찾아 연구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만주 무장 독립운동 1세대 김혁 선생의 손자인 김진도(71)씨는 잊힌 ‘조부의 기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세월을 회상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김혁 선생은 1896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친위대로 근무하다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 용인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만주로 가 흥업단·서로군정서 등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신민부 설립을 주도하고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 끝에 출옥해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1939년 숨졌다.
일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한 가족은 만주로 갔지만 당시 무장투쟁으로 산속에 숨어 있던 김혁 장군과 만나지는 못했다. 김혁 장군의 아들은 만주에서 운전을 배워 생계를 꾸리다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때 손자 김씨가 태어났다.
교사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김씨의 삶은 30대 후반이던 1970년대 말 완전히 바뀐다. 과거 김혁 장군을 수행한 이강훈 광복회장이 김혁 장군의 후손을 꼭 만나고 싶다며 김씨를 수소문해 만나 할아버지 얘기를 들었고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수소문 끝에 중국 옌볜대에 독립군 관련 자료가 그나마 잘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대학에 1만달러씩 수차례 기부한 후 대학이 자료 검색에 협조하기 시작해 어느 정도 자료를 수집했다. 객관성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본 국회도서관 마이크로필름을 샅샅이 뒤졌고 당시 수사 자료와 김혁 선생 체포에 대해 보도한 신문기사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김씨 형제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2006년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혁 선생을 추천해 선정되면서 김혁 선생의 업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자료를 모으기 위해 쓴 돈도 2억원이 넘었다.
김씨는 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하며 일제강점기 수많은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들의 행적을 찾는 국가의 노력은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김씨는 “할아버지가 상당히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기록이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정부는 무관심했다”며 “다행히 동생이 사업을 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처럼 잊힌 독립투사가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현재 김혁 선생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김혁 공원과 기념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