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째(!) 설이다.(흐규흐규)
하지만, 아직 30을 맞이한 88년생들에겐 마지막 희망이 있었으니!!! 생일 안 지난 것보다 더 중요한 이 것!!
‘이것’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씀!
뽀얀 고기 국물에 쫄깃한 가래떡을 듬뿍 듬뿍 넣고 푹 끓인 국.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사랑받는 떡 to the 국 이다. 우리 나라에선 언제부터 떡국이 새해 시작을 알리는 대표 음식이 되었을까?
One go! ‘지식을’ 씹고!
“새해 첫날, 일 년을 준비하는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가짐을 갖고자 흰 떡국을 끓여 먹는다” -최남식의 ‘조선상식문답’ 중
우리가 떡국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고구려 유리왕 이전부터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이웃 나라였던 중국에서도 설이 되면 쌀로 만든 경단을 국물에 넣은 탕위엔이 식탁에 올랐고, 일본은 된장이나 가다랭이로 맛을 낸 국물에 찹쌀떡을 넣은 오조니를 먹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새해를 맞는 동양 삼국의 설 풍습은 참으로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두 설날에 떡국을 먹게된걸까?
#벽에_X칠할때까지_장수합세
먼저 떡국의 주재료인 ‘떡’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흔히 길게 뽑은 가래떡을 썰어 떡국을 끓이는데, 이때 하얗고 가늘면서도 긴 가래떡은 ‘순수와 장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래떡을 최대한 길고 가늘게 빚어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또한 흰쌀로 만드는 가래떡은 양(陽)의 기운을 상징했는데, 음의 기운이 가득한 겨울에 가래떡을 먹어 양기를 얻어 체력을 보충하고자 했다고 한다. 특히 설날에 먹는 떡국은 ‘첨세병(添歲餠)’이라도 불렀는데, 이는 옛 조상들이 나이를 물을 때 “병탕(떡을 넣고 끓인 탕을 의미) 몇 사발 먹었느냐.”고 하는 데서 유래해 지금까지도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고!
#돈_많이_벌어_무하겠노_소고기_사묵겠제
그렇다면 장수를 의미하는 긴 가래떡을 굳이 왜 얇게 썰었을까. 동그랗고 납작하게 썰어 떡국을 만든 이유는 ‘재물’을 기원하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동그랗고 납작한 떡은 동전을 상징했고, 그렇게 만든 떡국을 먹으면 재물을 얻는다는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말하는 김에 별팁 하나 더!** ‘꿩대신 닭’이 떡국에서 나온 말이라고? 최근엔 사골 육수나 고깃물을 우려내 떡국을 끓이지만 과거엔 ‘꿩고기’를 우려내 떡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참고) 그러나 꿩은 사냥해야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귀했고, 꿩을 구하지 못할 경우 임시방편으로 꿩과 비슷한 닭으로 국물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꼭 맞는 적당한 것이 없을 때, 그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P.S 이 정도면 설날에 떡국 먹으며 꼬꼬마들에게 지식 자랑 하기 딱 좋은 꿀팁 아님?ㅎㅎ |
Two go! 화끈하게 빨고!
맛집 기자들이 설날을 맞이해 방문한 곳은 편수(개성 만두)로 유명한 자하 손만두다. 이미 만두 마니아 사이에선 꽤 정평이 나 있는 이 곳은 지난 2016년 11월에 공개된 ‘미쉐린 가이드(프랑스의 타이어 회사인 미슐랭사에서 발간하는 최고의 식당과 호텔 안내서 2017 ’에 꼽히기도 했다.
Three go! ‘요리하는 재미’를 맛보고!
흔히 1등 신붓감(?)이 되기 위해 반드시 들어야 된다는 신부 수업 코스로 ‘요리학원 수강’을 꼽는다. 요즘엔 워킹맘, 골드 미스 등 여성 직장인들이 늘어나면서 결혼에 목을 매는 경우가 줄었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엔 일찍부터 결혼을 선호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 초등학생 시절, 새학기가 시작되면 기입하는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엔 각 반에 한 명씩은 꼭 장래희망란에 ‘현모양처’라고 적는 친구들이 있었을 정도. 물론 그 나이에 당연히 세상 물정 모르고 한 말이었겠지만(20년이 지난 지금,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알고 까무러칠 몇 명의 친구들이 문득 떠오른다). 무려 20년하고도 몇 해 전이 돼버린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필자가 처음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추억을 소환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적이 있었겠지만,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그 당시 설날이면 필자의 집보다 더(!) 산골에 위치했던 외가와 친가를 번갈아 방문하며 새해 인사를 드리곤 했었다. 한복 곱게 차려입고 고사리 같은 손을 포개며 새배를 하면 꼭 어르신들이 필자에게 몇 천원을 쥐어주며 “벌써 다 컸네, 이제 시집가야지.”라는 덕담을 해주셨다.
이 덕담으로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필자가 살던 곳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강한 편이었다. 특히 초등학생 시절 6년 내내 그림자처럼 함께 동고동락하던 사(4)가지 팸이 있었는데, 그 중 일명 ‘조선시대 여성’이라 불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장래희망은 정말 6년 내내 ‘현모양처’였고, 심지어 특기가 ‘요리’였다. 그래서 방과 후면 사가지 팸이 다 같이 그 친구집에 놀러가서 간식을 먹으며 우정을 다지곤 했었다. 참고로 그 친구네 부모님께선 맞벌이셔서 늘 그 친구가 혼자 집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그 친구집에서 다 같이 놀러가게 됐고 간식으로 ‘따끈 따끈한 가래떡’과 꿀이 놓여 있었다. 자극적인 과자와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는 모두 무(無)맛이었던 떡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리가 자신있다는 그 친구를 주축으로 다 함께 대형 사고(?)를 치기로 결심했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초등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 ‘떡국’을 만들기로 한 것.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결과는 정말 완벽하게 폭망(폭삭 망하다)했다. 이건 떡국이 아니라 그냥 맹맹한 ‘계란+떡+야채가 들어간 뜨거운 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요리한다고 난장판이 된 부엌, 먹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요리 결과물까지 모두 쓰.레.기 뿐. 그 날 우리는 괜한 객기로 인해 평소 안 하던 청소를 친구네 집에서 하게 됐다. “이 정도면 정말 감쪽같다”며 완벽 범죄를 저질렀다고 우리끼리 나름 자축했지만, 그 날 밤 음식물 쓰레기통 속에 처참히 버려진 떡국 잔해물들이 고스란히 발견됐고 그 친구는 한 동안 자숙(?)의 시간을 갖게 됐다.
20년하고도 몇 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실제 ‘요리’가 특기라고 말했던 그 친구는 자신의 끼를 잘 살려 요리업계에 몸을 담고 있다. 하지만 더 놀랍게도 어릴 적 장래희망에 ‘현모양처’를 꿈꿨던 그는 비혼주의자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정가람기자 garamj@sedaily.com
**가격: 만둣국·떡만둣국 12,000원, 만두 전골 37,000~49,000원, 수육냉채 25,000~35,000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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