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일 안보동맹을 빌미로 일본에 대한 통상압력을 강화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거래외교’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다음달 10일 열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미일 양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대신 양자 간 통상교섭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미국이 자동차 교역과 통화정책을 걸고넘어지면서 양국관계가 흔들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30일 일본 언론들은 지난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대선 기간에 약속한 일은 확실히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서의 고용창출에 협조하도록 요청했다고 전했다. 이날 42분간 이어진 아베 총리와의 취임 후 첫 전화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안보 확립을 미국이 확실하게 책임지겠다고 강조하는 한편 “미국에 고용을 창출하고 싶다. 일본 자동차 업계도 미국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자동차 업계가 미국 내에서 15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며 일본이 미국 경제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달 워싱턴DC에서 열리는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통상정책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전화통화 이후 트럼프 행정부에 대응하기 위한 아베 총리의 행보도 빨라졌다. 지지통신은 아베 총리가 다자 간 무역협정 대신 양국 간 무역교섭을 중시하는 점을 고려해 다음달 정상회담에서 미국과의 양자 교섭 개시를 확인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전했다. TPP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한편 미국 측의 제안도 받아들임으로써 미일 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다. 아베 총리는 또 오는 2월3일께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 사장을 총리관저로 불러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다. 일본 자동차 업계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것이 뻔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트럼프 행정부와 일본이 이전과 같은 굳건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목소리가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TPP 탈퇴 의지를 분명히 한 상황에서 미일 양자 간 통상교섭이 시작될 경우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에 거센 통상압력을 가하며 양국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교섭이 시작되면 미국이 강하게 TPP 이상의 양보를 일본에 요구할 것이 확실시된다”는 경제부처 고위관료의 말을 전하면서 “타깃은 자동차무역이지만 TPP 교섭에서 일본이 사수한 쌀과 돼지고기 등 농산물 주요 5개 품목도 시장개방 압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일본 엔화 약세를 문제 삼아 엔저를 유도하는 일본은행(BOJ)의 금융정책을 타깃으로 하거나 TPP 협상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가 주장했던 환율변동 제한, 즉 ‘환율 조항’을 양자 간 협정에 포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BOJ의 정책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것으로 환율정책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한편 미일 양자 간 통상협정에서의 환율 조항 도입에 대해서도 “TPP와 같은 수준으로 주장할 것”이라고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거액의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교역 상대국의 환율조작을 거듭 지적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의 입장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일본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본의 안보 문제를 볼모로 통상이익을 취하려 하는 거래외교에 나서는 데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등에서 확실하게 일본 편을 들어주는 대신 일본에 경제적 양보를 대폭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마이니치는 “트럼프 정권이 안보 면에서는 미일 동맹을 중시하지만 통상이나 적정환율 문제에서 일본에 무리한 요구를 할 경우 미일 관계 전체가 삐걱거릴 우려가 있다”며 (양국 관계에서) 안보협력보다 통상문제의 우선순위가 높아지는 사태에 대한 정부의 경계도 높다고 전했다.
/신경립기자 klsi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