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태 테마주요, 그럴 리가 없는데…하필 내가 산 종목이”
지난해 10월 온라인 주식 관련 커뮤니티가 코스닥 A사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었다. A사가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된 고영태씨의 주식 투자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는 소문은 사실관계 확인 없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서울 강남경찰서에 고씨가 주식 투자 사기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소문은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고소인은 “고씨가 추천한 상장사에 투자하면 3개월 안에 3배로 불려주겠다고 말해 8,000만원을 건넸지만 원금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밝혔고 고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사건이 보도되면서 A사를 ‘비선실세 테마주’ ‘고영태 테마주’로 부르며 불안을 조장하는 ‘꾼’들도 나타났다. 급기야 A사 투자자들이 나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고소하겠다”는 댓글도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경제신문의 취재 결과 A사는 고씨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다른 코스닥 상장사가 잠깐 연루됐지만 이도 기업 자체와는 관계없이 꾼들의 사기극에 악용됐을 뿐이다.
조기 대선이 가시화하면서 정치 루머가 여의도 증권가를 흔들고 있다. 수십 곳의 기업이 증권가 루머를 통해 테마주로 등장하면서 주가가 요동치고 있다. 아예 일부 꾼이라고 불리는 악성 투자자들은 ‘찌라시’를 통해 직접 테마주를 발굴해 소문을 확대·재생산하기도 해 혼란이 커지는 상황이다. 장기 투자를 하면 주가 상승과 배당이 더해진다는 워런 버핏의 ‘스노볼 효과’가 소문이 소문을 낳는 정치 테마주에도 나타나고 있다.
◇복잡하고 난해해진 정치 테마주=정치 테마주가 선거를 앞두고 시장을 교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청권 수도이전 계획’으로 충청권에 연고를 둔 기업이 일제히 주목받았고 17대 대선 때는 대운하 공약으로 중소 건설사 주가가 급등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18대 대선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정책이 아닌 후보의 지연·학연 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테마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박 대통령의 친동생 박지만씨가 대주주인 EG, 안철수 의원이 창업한 안랩 등이 대선 테마주로 주목받았다. 안랩 출신 임원이 부사장으로 재직한 써니전자는 2011~2012년 2년간 주가가 50배 이상 오르기도 했다.
최근 테마주 시장은 더 복잡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조기 대선이 가시화하면서 후보들의 행보 변화에 따라 정치 테마주가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 후보에 연결된 종목 수는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주가 방향은 개별 종목마다 다른 양상을 보인다. ‘문재인 테마주’가 대표 사례다. 현재 문재인 테마주로 언급되는 종목은 20여곳에 이른다. 통상 시장은 최근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면서 관련 테마주 역시 주가가 상승 추세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세부 종목을 들여다보면 대장주 역할을 하는 DSR제강은 대표가 문 후보와 경남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최근 주가가 3배 가까이 올랐다. 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테마주에 묶인 20여개 기업 중 7곳은 국정농단 조사가 시작된 지난해 10월 말 대비 주가가 하락했다. 지난해 상반기 문재인 테마주 주가 상승을 견인했던 서희건설·우리들휴브레인 등도 하락세다. 정치 테마주의 생명력이 과거보다 짧아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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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돌연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1일 더욱 악화했다. 당시 반 전 총장은 장 마감 후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반기문 테마주로 분류된 지엔코·성문전자·에스와이패널·광림·한일사료 등 50여개 종목이 시간외거래에서 줄줄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2일에는 황교안 테마주가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하면서 인터엠·솔고바이오 등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세를 나타냈다.
◇개미들 찌라시 만들고 기업은 테마주 입성 노력=이런 현상은 투자자들이 모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보다 빠르게 정보를 생산·공유할 수 있게 된 영향이 크다. 인맥·학연·지연 등 사소한 연결고리만으로 주가가 급등락하기 때문에 일부 투자자들이 직접 공시를 통해 정치 테마주를 발굴하면서 테마주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이다. 20여년간 금융투자 업계에 종사한 한 증권사 직원은 “일부 투자자들은 공시를 통해 기업의 신규 임원 선임 등만 전문적으로 분석해 정치인과의 관계를 만들고 찌라시를 퍼뜨리기도 한다”며 “이렇게 관계가 밝혀지면 주식 관련 인터넷 카페나 커뮤니티, 주식 게시판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가 퍼진다”고 설명했다.
일부 상장사는 스스로 유명 정치인의 친인척이나 관계자를 자사 임원에 임명해 스스로 테마주에 들어가기도 한다. 유가증권에 상장된 E사는 지난해 11월30일 오전 돌연 주가가 20%나 올랐다 오후에 다시 하락하는 ‘주가 부메랑’ 현상을 겪었다. 장이 시작한 직후 800원대였던 주가가 1,020원까지 올라서면서 각종 주식 카페에는 “드디어 지폐주가 됐다” “산타 랠리가 시작되고 있다” 등 기대감을 드러내는 글로 도배됐다. 주가가 폭등하면서 오전 중 해당 기업의 매수를 시작한 투자자도 나타났다. 하지만 환희는 오후1시께부터 주가가 폭락하면서 좌절로 바뀌었고 널뛰기하던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4%나 하락하며 장을 마감했다. 이날 주가에 영향을 미칠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다만 취재 결과 전날 이 기업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관련된 전직 국회의원 출신이 임원으로 영입된다는 소식이 증권가에 돌았던 게 주가 급등의 원인으로 분석됐다. 또한 영입이 결정된 해당 정치인이 입사를 반려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오후께 주가가 다시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공시도 되지 않은 전직 국회의원의 입사·퇴사 소식에 주가가 하루 사이에 30%가량을 오갔다.
◇ ‘짝퉁 테마주’까지 등장, 손실은 오롯이 개미들 몫=누구나 테마주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근거 없는 거짓 소문으로 테마주가 되는 사례도 생겨났다. 지난해 발생한 ‘짝퉁 반기문’ 테마주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장에는 반기로 파인아시아자산운용 대표가 반 전 총장의 사촌동생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회사와 연관된 파인디앤씨 주가가 급등했지만 이 같은 소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현재도 이 회사의 주가는 여전히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동국알앤에스는 지난해 본사가 봉하마을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문재인주로 수혜를 입었으나 최근에는 반기문과 사돈관계인 유원석 변호사가 이 회사의 모회사(동국산업) 고문이었다는 이유로 반기문 테마주로 둔갑하기 했다.
이처럼 잘못된 정보가 생산·확대될 경우 손실은 오롯이 개인투자자들의 차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정치 테마주 투자자 중 97%는 개인이며 투자자 10명 가운데 7명은 손실을 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개인투자자의 평균 손실액은 191만원 수준으로 대부분의 종목이 대선 후보의 학연(학교 동문), 지연(친인척 재직), 친인척 지분 보유 등의 풍문과 루머에 의해 주가가 움직였다.
이처럼 투기성 거래가 과열되고 있지만 금융당국의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금융·수사당국은 지난 해 12월 루머유포 종목을 색출해 투자 경보를 발동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마련했지만 실효성은 높지 않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관련 종목에 단일가 매매를 적용하는 등 추가적 조치를 마련할 계획이지만 이미 이틀 사이 수십 개 종목의 주가가 하한가까지 떨어진 만큼 교란된 시장을 바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재 규정 개정에 대한 논의가 막바지 단계”라며 “최대한 신속하게 대응해 투자자 손실을 최소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지혜·박호현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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