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특검의 영장청구가 기각됐을 때 야권은 이구동성으로 법원을 비판하고 나섰다.
삼성그룹이 미르· K스포츠 재단에 거금을 출연하고 최씨 측에 뭉칫돈을 건넨 것은 대가를 바라고 한 만큼 구속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법의 최종심판을 기다리지 않아도 확실한 심증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야권 대선후보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달랐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소신을 ‘광장 민심’과 맞바꾸지 않았다. 그는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잘라 말했다.
‘대기업=척결 대상’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증폭시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는 ‘정치의 결’이 달랐다.
안 지사의 지지율 상승이 심상치 않다. 태풍으로 번질지, 잠깐 미풍에 머무를지 등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가 지금 대선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정치권은 물론 차기 대선후보들이 안 지사의 가파른 지지도 상승세에 놀라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 사이에서 ‘도토리 키재기’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일반의 분석과 여론을 뒤로하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모양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신드롬’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전망도 내놓았다.
실제 4%대에 그쳤던 안 지사의 지지율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불출마 선언 이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11.2%로 급상승한 데 이어 줄곧 10% 이상을 보이고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야권 주자로서 보수 성향이 강한 중년층 이상의 유권자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안 지사는 50대에서 16.1%, 60대에서 12.4%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진보 진영에 속하면서도 보수층을 아우르는 ‘합리적 진보’ 프레임이 국민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정치적 의제 선정 능력이 탁월하다. ‘대연정론’을 던져놓고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 대표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안 지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어젠다 세팅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안보 분야에서도 보수층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와 관련해 “한미 정부 간 합의를 섣불리 변경할 수 없다”며 ‘우클릭 메시지’를 내놓았다. 선명성을 위해 좌파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와는 분명하게 차별화된 전략을 세운 데 대해 보수층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안 지사를 지지하는 핵심 유인으로 작용한다. 안 지사는 과거 노 전 대통령 대선캠프에서 정무팀장으로 일하며 당선에 일조했으나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참여정부에서 공직을 맡지 못했다. 친노 유권자들 사이에는 노 전 대통령 대신 감옥에 갔지만 한 번도 원망하지 않은 안 지사에 대한 동정여론이 많다.
따라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안 지사가 친노 뿌리를 공유하는 문 전 대표와 벌일 ‘적통 경쟁’은 앞으로 전개될 대선 레이스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흐름으로 볼 때 안 지사가 ‘페이스메이커’에서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에 점차 힘이 실린다. 이념적으로 유연하고 정책적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면서 진보진영은 물론 중도·보수층을 껴안을 수 있는 확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만 보수층을 아우르는 정책을 얼마나 정교하고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고 유권자들로부터 정책의 진정성을 얼마나 평가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대선 레이스의 최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광수·박효정기자 br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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