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경스럽게도 당시 최저임금을 기대한다고 대답했다.
“헤에에에에?3700원이요오오오?”
점장은 내 대답에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일단 이 사람부터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아니,그게 아니라,그만큼 받아야 된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이런 걸 잘 모르거든요….”
“어우 아니에요 승태씨. 편의점은 일이 쉬워서 그렇게 못 드려요.”
아무리 일이 쉽고 단순해도 최소한 이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고 정한 것이 최저임금이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당장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용서를 구했다.
“여기서는 시간당 3000원 정도 드려요. 승태씨는 특별히 3,100원 드릴게요.”
서경씨가 얼마 전 읽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도 좋은 책이겠지만(안 읽은 티냄) 한승태 작가가 지은 ‘인간의 조건’도 우연히 마주친 훌륭한 책이었죠.
한 작가는 지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꽃게잡이배 선원·양돈장 ‘똥꾼’·‘편돌이’ 등 우리 사회의 몇 가지 ‘극한직업’들을 겪어보고 이 책을 썼습니다. 흥미 위주의 고생담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 몇 가지를 총체적으로 담은 것 같은 책입니다. 작가 본인이 정말 돈에 허덕이면서 저 직업들을 전전했(…)기 때문에 진정성은 차고 넘칩니다.
취업난과 최저임금처럼 신문에서 매일같이 등장하는 주제뿐만 아니라 갑질, 계급이동의 고착화, 인간의 존엄성 같은 문제들까지 건드립니다. 몇 대목을 더 뽑아봤습니다.
“너덜너덜해진 장갑, 하도 빨아서 잔뜩 늘어난 마스크,똥을 뒤집어쓴 우의. 얼굴 곳곳에 똥이 튀었지만 손도 똥 투성이라 닦아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 그걸 보면서 그들(간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저놈 좀 보소. 어른이 지나가는데 인사를 안하네. 요런 괘씸한 꼴을 봤나?뿐이었다.”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길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고시원 투숙객과 일반 주택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비슷한 비교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중략)추위가 심해지면 수도관이 얼어붙었다. 상황이 거기에 이르면 21세기 서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겨울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 된다. 처음에는 다른 화장실을 찾아보지만 도움은 되지 않는다. 가징 가까운 공동화장실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동사무소에 있었다. 급할 때는 고시원 뒷산에 오르지만 등산객들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엔 소변 위에 다시 대변을 보고 거기다 또 볼일을 보는 재앙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면 얼지 않는 싱하수도가 인권 확립에 얼마나 큰 기여를 헸는지 깨닫게 된다.”
“내 동료들은 우리에게 임금을 지급하던 사람들 못지 않게 성실했지만 수십 년째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은이는 양돈장에서 ‘돼지 1만5,000여마리가 쏟아놓는 똥오줌과 태반과 사산된 새끼와 정체불명의 핏덩이’를 치우면서 월급 102만원씩을 받습니다. 꽃게잡이배에선 정신이 희미해질 정도로 고된 일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한 채 떠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우리나라 카페 직원, 식당 직원, 편의점 직원들이 왜 그렇게 불친절한지 궁금했는데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서 이해하게 됐습니다. 최저임금도 안되는 돈을 받아가면서 온갖 진상들을 만나다 보면 저도 그렇게 될 것 같단 생각이 들더군요. 유럽이나 미국에서 마주친 가게 직원들이 여유있고 친절한 건 애초에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인 겁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4년 간 ‘인간의 조건’을 시험한 작가는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좀도둑질이나 일삼는 정치인에게 사회봉사랍시고 꽁초나 줍게 할 게 아니라 똥 리어카를 끌게 할 일이다. 멀리 양돈장까지 올 필요도 없다. 신림동의 높고 가파른 언덕을 따라 폐지 줍는 노인들의 리어카를 끌어도 좋다. 그래야 자기들이 어떤 사람들의 돈으로 장난을 쳤는지 깨달을 테니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돈만 밝히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젊은 시람들이 피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누군가는 최악의 생활환경에서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게 문제될 것 없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왜 누군가는 항상 고통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어째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들만이 이 엉망진창인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이 시점에서 최순실 같은 사람도 떠오르고, 차명진 전 국회의원의 ‘최저생계비 체험기’도 생각나더군요. 그리고 “왜 더 노력하지 않느냐”는 훈계가 얼마나 예의없고 무식한 짓인지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집어든 책인데 글솜씨나 이야기의 흡입력이나 디테일한 인물묘사 등이 어지간한 기자·작가의 싸대기를 후려칩니다. 세 번쯤 후려치시는 것 같습니다(안습…).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권하고 있습니다. 2013년 출간된 책인데 제가 너무 뒷북이긴 합니다. 그래도 좋은 책이라서 두고두고 추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작가님이 앞으로도 좋은 책을 많이 써주셨음 하는 바람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분은 서울신문의 인터뷰(클릭)을 참고할 만합니다. 주말에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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