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후, 청명한 하늘이 보이는 날. 광화문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한 폭의 동양화다. 미세먼지 속에 사는 우리들의 눈에 인왕산이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인다면 선조들의 망막에 비친 이곳 풍광은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일대의 풍광이 겸재 정선의 붓끝에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한 국보급 작품으로 거듭나 화폭에 담긴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번주에는 겸재 정선의 발자취를 따라 창의문에서 자하동·청송당·청풍계·청휘각·가재우물터·송석원터·수성동까지 그의 발자취가 깃든 구석구석을 누벼봤다.
겸재 정선은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 식구들이 살고 있던 인왕산 아랫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경복궁 서쪽의 청운동·자하동 일대는 요즘으로 치면 강남구 청담동쯤 되는 동네로 정선은 한양 최고의 중심지로 이사를 온 셈이었다.
당시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편인 서촌에는 왕족들이 주로 살았고 안국동·가회동 등 궁 왼편의 북촌은 사대부들이 살던 동네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줄행랑을 치자 민초들의 왕실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싸늘해졌다. 권력보다 돈이 낫다는 생각이 번져나갔고 왕권이 약화하면서 재물을 가진 중인들의 힘이 강해졌다. 이 무렵 중인들은 왕족들의 거처인 서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세태 덕분에 겸재도 인왕산 아랫자락에 거처를 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해도 현재의 행정구역상 청운동·옥인동에 해당하는 서촌은 안동 김씨와 그들의 외가인 밀양 박씨, 풍양 조씨 등 쟁쟁한 세도가들의 터전이었다. 이 같은 환경은 겸재가 서인 최고의 실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계기가 됐다.
창의문 너머 평창동 일대에는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는데 겸재는 이곳에 일자리를 얻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이 인왕산 일대를 묘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붓끝에서 완성된 서촌의 풍광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한다.
기자가 이날 걸은 창의문~자하동~청송당~청풍계~청휘각~가재우물터~송석원터~수성동은 겸재의 발길을 따라 인왕제색도의 붓놀림 안에 생생히 묘사된 사생의 현장인 셈이다.
그림을 읽어보면 260년 전 일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식수 확보였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인왕제색도에 그려진 네 개의 물줄기가 입증한다. 그림 안에는 사직동천·수성동계곡·청풍계천·백운동천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현재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왕제색도는 원래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 그는 인왕제색도와 함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박정희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정치에 입문한 후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을 거쳐 지역구에서 출마하면서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그림을 매각했다. 인왕제색도는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게 됐고 지금은 국보로 지정됐다.
겸재의 그림 중에는 청와대 뒤편 백악(白岳)의 서쪽을 그린 ‘자하동(紫霞洞)’도 빼놓을 수 없다. 자하동은 종로구 청운동 소재 창의문 일대를 묘사한 것으로 현재의 지형과 대조해보면 곳곳의 지형이 그림과 일치한다.
겸재는 이곳에 거하면서 이병연(李秉淵) 같은 문인들과 교우를 통해 자신의 회화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켰다.
자연을 그린 그의 그림은 이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했던 명소들과 그가 지방 수령으로 있었던 근무지는 예외 없이 그림으로 남아 오늘에 전한다.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은 겸재의 그림 덕분에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겸재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문화재로 지정했는데 이곳은 종로구 누상동과 옥인동에 걸쳐 있는 기슭과 계곡으로 물소리가 유명하다고 해 조선시대부터 수성동이라 불려 왔다.
서울시가 문화재로 지정한 곳은 인왕산길 아래 계곡 상류에서 하류 복개도로 전까지 길이 190m의 계곡과 옥인아파트 옆에 있는 길이 3.8m의 돌다리다. 이곳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1418~1453)의 집터로도 유명하다.
겸재는 자신의 거처였던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 일대를 여덟 폭의 진경산수로 담아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으로 남겼다. 수성동의 풍경도 그중 한 폭으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이날 동행한 최정남 해설사는 “옥인아파트 옆 돌다리는 한때 안평대군 집에 있었다는 ‘기린교(麒麟橋)’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최근 감식 결과 단정할 증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며 “서울시는 이 돌다리가 겸재의 그림에 등장하는 데다 사대문 내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통돌다리라는 점에서 문화재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글·사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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