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터지기 1년 전인 1996년 9월,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6.8%로 추정해 발표했다. 중앙은행이 7%대 고성장의 종언을 선언한 것인데 언론들은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의 길목에 접어들었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장기 저성장국면에 빠진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호들갑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7%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어오던 한국 경제에는 근본적인 ‘체질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바뀌지 않으면 경제가 서서히 말라간다는 중앙은행의 ‘무서운’ 경고였던 셈이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생산요소를 모두 활용해 물가를 자극하지 않은 채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경제 성장능력이다. 경제의 평소 실력으로 보면 된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경제의 쇠락으로 이어진다. 잠재성장률이 6%로 하락하자 옐로카드를 던졌던 이유다. 하지만 그런 경고는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다른 나라의 얘기처럼 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백약이 무효였다. 지난 20년간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한은, 국내 민간연구소 등은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무수한 해법을 제시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였다. 잠재성장률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더 무서운 것은 하락의 추세다. 한 번쯤은 상승할 법도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마치 프로그램화라도 돼 있는 듯 잠재성장률은 5년마다 일정하게 1%포인트씩 낮아졌다. 하락추세선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얘기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더 강한 해법을 내고 실행하지 못하면서 그 힘을 꺾을 수 없었고 현재와 같은 모습이라면 앞으로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우리 경제는 20년째 하락 추세선을 뚫지 못하면서 잠재성장률은 이제 2%대로 무너졌다. 공식화만 안 됐을 뿐 학계에서는 이미 기정 사실화돼 있다. 한은 역시 머지않아 이를 공식 인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23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 간담회에서 “잠재성장률을 다시 추정하겠다”면서 “최근 수년간 성장률이 2%대를 유지하고 있고 통계청에서 인구 추계도 새로 발표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잠재성장률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공식화한 한은의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3.0~3.2%. 2015년에 밝힌 것인데 새로 추정할 수치는 이보다 더 낮아진다는 얘기다.
잠재성장률 2%는 국가의 경제적 역량이 거의 가라앉은 상태와도 같다고 한다. 대외여건이 조금만 악화해도 마이너스 성장으로 직행할 수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로서는 경고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꼴이다. 더욱이 잠재성장률의 하락속도는 주요 선진국보다도 빠르고 가파르다. 오죽했으면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마저 “이대로 가다가는 10년 내 잠재성장률이 1%대까지 하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밀려온다”고까지 했을까.
해법은 20년째 나왔다. 골자는 비슷하다. △서비스 중심의 대대적 규제 완화 △좀비 기업을 정리하고 신산업으로 돈이 몰리도록 유도 △비정규직과 정규직 격차 해소 등이다. 문제는 긴 호흡의 실행력과 제대로 된 정치의 부재다. 정책의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없다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기지표에만 집착했다. 근본적인 처방은 소홀한 채 정책은 겉돌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고 대통령은 탄핵된 데다 여러 명의 전·현직 장관이 구속되는 ‘국가위기’ ‘경제위기’의 상황에서도 정쟁과 대립만 반복되는 것도 여전하다.
그러는 사이 둥그렇던 경제 수레바퀴는 시나브로 평평해지고 있다. 둥근 바퀴로 쌩쌩 달리던 한국 경제는 이제는 덜컹거리면서 ‘무감각’의 저속운전을 할 뿐이다. 일본이 올해 잠재성장률(0.8%)의 두 배인 1.5%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애써’ 비웃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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