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미 꽃빔 대표 인터뷰
건축가를 꿈꾸다 한복 디자이너로
우리 문화가 꽃 피길 빌어보는 소망
사방이 산딸기였다. 집 근처 동산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마치 산딸기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방 같았다. 가운데 앉아 아무 곳에나 손을 뻗으면 산딸기를 한 움큼 집을 수 있었다.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장면에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생활한복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이찬미 꽃빔 대표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4년을 대부도에서 지냈다. 원래 살던 곳은 부천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이사를 갔다.
대부도 집에는 도시에 살 때는 갖지 못했던 넓은 마당이 있었다. 부모님은 흙뿐이던 마당에 굴 껍질을 깔고 꽃을 심으셨다. 가만히 앉아 꽃을 보고 있으면 벌이 날아와 꿀을 빨아 먹었다.
학교까지는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불편하진 않았다. 사계절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길을 걷다 보면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나 여름 장마철의 흙 내음, 겨울에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생생했다. 가을은 사계절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상큼한 포도 향기가 섬 전체에 퍼졌다. 대부도 주민 대부분은 포도농사를 했다.
“섬에서의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자연 속에서 뛰놀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해요. 한복을 디자인할 때 필요한 감성이나 창의성은 동화 같던 대부도 생활에서 얻은 셈이죠.”
◇건축학도가 되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학업을 위한 결정이었다. 친오빠와 둘이 자취를 했다. 부모님은 대부도와 부천의 자취방을 오가면서 남매를 챙겨주셨다.
건축학과가 가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뭔가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대부도의 집 마당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본 것도 영향을 줬다.
“그냥 막연하게 끌렸던 것 같아요. 조금 알아보니까 건축가는 정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건물을 완성하더라고요. 크게는 도시의 문화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까지 알아야 할 것도 많죠. 그런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대표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역시 건축업계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큰 고민 없이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 대표는 2006년 수원대 건축공학과로 입학했다. 대학 시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건축공학과 내에는 작업실로 불리는 여러 동아리가 있었다. 신입생들은 이 중 하나를 선택해 활동해야 했다. 고심 끝에 ‘공간쌓기’라는 곳에 들어갔다.
작업실 생활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여느 대학 동아리가 그렇듯 건축 공부라는 주된 목표와 술자리가 함께 이뤄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게 좋았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에요. 낮에는 도서관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토론하다 밤이면 술 한잔 하면서 그 자리를 이어가는 거죠.”
1학년 여름방학에 참석했던 2주일 동안의 합숙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여름방학 합숙은 일종의 전통이었다. 신입생들이 한 조를 이뤄 건축물 모형을 완성하는 행사였다. 2주 만에 건축물의 설계부터 모형 제작까지 이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합숙 마지막에는 건축업계에서 현역으로 있는 선배들이 방문해 작품 품평회를 열었다. 칭찬이 오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크리틱’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 내내 신랄한 비판이 계속됐다.
“합숙으로 신입생들은 건축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를 얻게 되죠. 뭔가 만들어냈다는 뿌듯함과 선배들의 비판이 섞이면서 한 단계 성장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작업실 선후배들과는 여전히 끈끈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것보다도 큰 가치인 ‘사람’을 얻은 셈이다.
◇첫 해외 경험은 필리핀으로
1학년을 마치고 필리핀행을 결정했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마침 외삼촌이 필리핀에서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가이드를 보조하게 됐다.
처음 맞은 손님은 졸업 여행을 온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그들을 태울 버스를 타고 공항을 향하는 데 뭔가 이상했다.
“버스가 일반 공항이 아닌 처음 들어보는 공항으로 가더라고요. 철문 몇 개를 지나니까 군부대까지 나왔죠. 우리나라로 치면 성남공항 같은 곳이었나 봐요. 관제탑 안에 들어가서 생도를 기다리는 데 정말 떨렸어요.”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옆에는 필리핀의 고위 장교로 보이는 사람까지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초록색 비행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거대한 군용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고 문이 열렸다. 각을 잡고 걸어서 나오는 생도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원래 버스에 탈 때 어디에 앉아야 할지 정해드려요. 그런데 알아서 착착 앉더니 ‘하나, 둘, 셋 이상 없습니다’고 인원 체크까지 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반해서 필리핀 오길 잘했다 싶었죠.”
시작이 좋았다. 이후로는 신혼부부들의 여행을 도와주는 역할이 주 임무였다.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푸에르토갈레라’라는 곳과 마닐라를 오갔다. 쉬는 날이면 해변을 가거나 짧게 여행을 떠났다.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의사소통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동안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고, 그 안에서 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해외에 나와서 보니깐 한국은 참 자랑할만한 나라인데 제가 너무 모르고 있더라고요.”
한국이라는 나라를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해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나라, 일본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른 나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기왕이면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인 일본을 가고 싶었다. 일본어 공부를 하며 교환학생을 준비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09년 일본 교토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가게 됐다. 한국인들이 많은 학교라 적응하기도 수월해 보였다.
일본은 기대 이상이었다. 현대적인 것과 전통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교토의 시치죠역에는 ‘카모가와(鴨川)’라는 얕은 강이 흐른다. 강의 양옆으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은 서로 정반대다. 한쪽에는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맞은 편에는 현대적인 빌딩 숲이 들어서 있다. 하나의 도시 속 두 가지 전혀 다른 광경은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를 보이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문화는 일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질 게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필리핀에 다녀와서 우리 문화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보존하는 것만큼은 일본이 앞서 있었어요. 부럽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도 컸죠.”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도 색달랐다. 어느 곳에서나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였다.
같은 해 12월에 열린 일본의 지역축제 ‘마쯔리’는 그 차이를 더 느끼게 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지만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아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열이 너무 심해서 축제에 갈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때 아니면 언제 또 오겠냐’는 생각에 무리한 거죠. 막상 가니 또 버틸 만했어요. 여기저기서 기모노를 입고 축제를 함께 즐기는 모습을 봐서 괜찮아졌나 봐요.”
기모노가 부러웠던 게 아니다. 전통 의상을 사람들이 어색함 없이 입고 다니는 문화가 좋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머릿속에 심어졌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가 사라졌다
졸업 후에는 한 건축설계회사에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크지는 않지만, 매출은 잘 나오는 탄탄한 회사였다. 일은 즐거웠다. 만 3년간 밤을 새워 가며 열정을 쏟았다. 설계한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3년을 꼬박 일했을 때쯤 회사가 없어졌다.
“건축 경기가 안 좋았을 때였어요. 회장님이 몇 개 부서만 남겨놓고는 회사의 문을 닫아버렸죠. 운영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런 결정을 내리더라고요.”
회의감이 들었다. 낮은 연봉에도 열정 하나로 버틴 3년이었다. 새벽 3~4시에 퇴근하고 오전에 바로 출근하는 일상도 견뎌왔다. 개인 생활이 없을 정도였다.
이 대표의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나이가 어렸고 퇴직금과 위로금, 실업급여까지 모두 받았으니까. 다른 직원들은 답이 없었다. 출산 휴가를 갔다가 돌아온 여자 선배는 6개월의 근무 기간을 채우지 못해 수당을 다 받지도 못했다.
건축사를 따기 위해서는 2년의 경력이 더 필요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해서 그 기간을 채울까도 생각해봤다. 대형 건설사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과감하게 새로운 준비를 하기로 했다.
“큰 여행 가방을 하나 샀어요.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쳐서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었거든요. 국비가 지원되는 영어 수업을 등록해서 여행 준비도 시작했죠.”
추상적으로만 그려왔던 창업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필리핀과 일본에서 보낸 2년의 기간으로 얻은 결론이었다.
사업의 방향성은 정했지만, 실현 방법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 여행과 창업 준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여행을 꿈꾸고,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며 창업을 그렸다.
◇꽃처럼 예쁜 우리 옷, 꽃빔
생활한복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특별한 계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본의 기모노 문화를 보며 한국에서도 한복의 인기를 높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옷을 수선하고 만드는 것을 봐왔던 것도 영향을 줬다.
“전문적으로 옷 가게를 하신 건 아니었지만 제 옷은 자주 만들어 주셨어요. 못 쓰게 된 커튼을 원피스로 바꿔주기도 하셨죠. 꽃빔에서 판매한 첫 저고리를 제작해 준 것도 어머니셨어요.”
이 대표는 생활한복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까지 진행해 우리 일상생활에 한복을 전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2015년, 서울산업진흥원(Seoul Business Agency·이하 SBA)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에 덜컥 붙은 것이다. 준비하던 세계 여행은 뒤로 미뤄야만 했다.
SBA의 창업지원은 강남 역삼동 사무실에 부스 하나를 만들어 주는 형태로 이뤄졌다. 꽃빔의 시작이었다.
꽃빔이라는 이름은 긴 고민 끝에 만들었다. ‘꽃’과 명절에 입는 새 옷을 부르는 ‘빔’을 합쳐 꽃처럼 예쁜 옷이라는 의미로 알려졌지만 다른 뜻도 있다. ‘빌다’의 명사형 ‘빔’을 써서 우리나라 문화가 꽃피길 빈다는 소망도 담았다.
“이름 짓는 데만 두달 가까이 썼어요. 단순히 옷을 의미하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리 문화를 알리겠다는 창업의 원 목표도 함께 담고 싶었죠. 머리를 쥐어짜느라 고생은 했지만 예쁜 이름이 나온 것 같아서 만족합니다.”
처음 해보는 사업은 절대 쉽지 않았다. 월급날이면 꼬박꼬박 돈이 나왔던 직장인 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외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활한복 제작 과정도 자갈밭이었다. 건축 설계를 하면서 디자인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옷을 그리거나 색을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디자인한 옷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천을 떼러 가면 생각했던 색감과 달라서 구매를 포기하기 일쑤였다. 마음에 드는 색의 옷감을 찾기 위해 의류 원단 업체를 12군데 이상 돌아다니기도 했다.
“제가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전혀 몰랐어요. 그만큼 사업하는 게 빡빡하다는 의미겠죠. 보람은 커요. 건축 설계를 할 때는 완성품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생활한복은 눈앞에서 완성본을 볼 수 있으니까 더 욕심이 생겼죠.”
◇계속 빌어봅니다
꽃빔은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다.
한국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에서 입점 디자인으로 선정돼 청와대 사랑채와 K-STYLE 허브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에 진출했다. 동대문과 신촌에서도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하이서울 우수상품 어워드’의 우수 브랜드 상품으로도 지정된 상황이다. 하나의 한복을 만들 때 쏟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옷의 제작을 맡을 직원과 업무 전반을 도울 디자이너도 한 명씩 고용했다.
이 대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 눈앞의 일부터 하나씩 해나갈 생각이다. 우리 문화의 다양화와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큰 틀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처음 창업을 시작할 때, 나중에 잘 안되면 어쩌지라는 걱정보다는 우선 해보자는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앞으로도 그 뚝심을 잊지 않겠다는 목표다.
“큰 계획을 세워도 항상 변수가 존재하기 마련이잖아요. 너무 먼 미래를 보기보다는 더 많이 사랑받는 예쁜 생활한복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해야죠. 열심히 하면서 성공을 빌다 보면 좋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까요?”
/정순구기자 soo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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