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붓으로 선을 그린다. 그리고 또 그린다. 온종일 그려 겨우 책이 완성될 때쯤, 물감을 다 지운다. 90% 이상의 안료가 사라진다. 사라진 선 위에 다시 얇은 붓으로 선을 그린다. 이진용(56) 작가는 이런 과정을 ‘시간을 압축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1년의 작업만으로 10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붓만 들고 살았다’고 평하는 장인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 ‘이진용: 컨티뉴엄’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하루 세끼 다 먹고, 잠잘 것 다 자면 언제 그림을 그리느냐”는 그는 개인전에서 상상하기 힘든 숫자인 22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가는 하루를 오후 7시 이전과 이후로 분리한다고 한다. 낮에는 조각가로 활자 작업을 진행한다. 오후 7시가 되면,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 속에서 명상하며 자신 속 다른 자아를 불러낸단다. 한 시간 가량의 명상이 끝나면 오후 8시부터는 화가 이진용으로 앞서 ‘시간을 압축하는 작업’으로 명명한 얇은 붓으로 선을 그리는 작업을 오전 6시까지 진행한다. 물론 오전 6시에 다시 조각가로 돌아가 작업장으로 출근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본능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는 그는 “절대 졸린 걸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다”면서 “어떻게 자신이 좋아하는 행위를 하는데 잠이 올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활자(Type Series)’와 ‘양장본(Hardbacks Series)’연작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활자시리즈는 활자 하나하나를 배열하고 본뜨고 굳힌 이후 에폭시를 바르고 말린다. 이후 돌조각과 모래를 뿌리고 물로 씻어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이어 이렇게 만든 작품 170여개를 벽에 다시 격자처럼 배열해 마치 프랙털(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과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양장본’ 시리즈는 얇은 선을 수없이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물방울로 바위에 구멍 뚫기’라 설명하는데, 얇은 선 한 줄과 활자 하나하나가 바로 ‘물방울’인 셈이다. 전시는 영국 폰톤 갤러리와 동시에 진행된다. 7월30일까지.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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