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나날이 새로운 군사위협 카드를 꺼내 들며 한반도 주변의 안보지형을 뒤흔들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초연하다. 위기감을 퍼뜨려 협상력을 높이려는 북측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되지만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오로지 ‘외교적 수단’을 통한 대화 유도의 한 길만을 걷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부터 ‘대북 외교적 제재·압박→북의 군사도발 중단→대북 대화 재개→비핵화 검증 및 단계적 지원→한반도 평화정책’으로 요약되는 일명 베를린 구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외교적 제재 속에도 북한은 오히려 군사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더구나 도발의 위협 대상이 한국을 비켜나 미국과 일본이 되면서 북핵 및 미사일 문제는 ‘남북문제’보다는 ‘북미’ 및 ‘북일 문제’ 중심으로 구도가 전환될 조짐이다. 북한이 한국을 제외하고 미국·일본과 직거래를 시도하려고 할수록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의 궤도대로 대응을 지속하기로 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베를린 구상은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며 “핵과 미사일 문제는 결국 북한이 대화로 나오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으며 이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한미와 국제사회가 공조해 북한에 대한 외교적인 압박 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해 대화의 문은 열어 두겠다는 게 현 상황을 안이하게 보는 것은 아니라고 청와대 참모진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0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북한에 대해 “벼랑 끝으로 가고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강화와 같은 군사옵션도 북한에 취할 ‘모든 조치’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다만 ‘벼랑으로 떨어지려는 나라는 없을 것’이므로 현재의 위기 고조는 역설적으로 북한 문제 해결의 적기 징조를 의미한다는 게 정 실장 등의 판단이다.
북한의 냉대에 가까운 무응답과 군사적 도발에도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지난 2000년 당시의 경험 때문이다. 청와대의 또 다른 고위관계자는 “2000년도에도 현재처럼 북미 간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으나 북측이 미국 측에 방북을 요청했고 이에 맞춰 당시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위기 타결로 국면이 전환됐다”며 “그 배경에는 북한의 강도 높은 위협과 도발에도 ‘진정성’ 있는 대화와 외교적 방법을 통한 해결 의지를 보였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을 설득했던 역할이 컸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올브라이트식 극적 대화 타결’은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게 문 대통령 참모진의 설명이다. 북한이 군사도발로 갈등을 고조시키는 것도 향후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감안해 사전에 협상력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참모진 일각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북미 간 대화를 매개함으로써 한반도 위기관리를 주도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2000년과 현재의 여건 차이가 확연하다는 게 변수다. 당시와 달리 현재는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겨냥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탄두 소형화 기술을 거의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한 민주당이 집권했던 올브라이트 전 장관 때와 달리 미국에는 강한 보수 성향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6자회담의 틀에 비교적 전향적이었던 때와 달리 현재는 미국과 신냉전으로 팽팽하게 갈라섰고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문제로 우리 정부와도 감정의 골이 깊다는 점도 17년 전과 달라진 악재다.
그러나 청와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북한이 핵 소형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보고서가 나왔지만 이는 우리로 치면 국방연구소에 해당하는 연구기관의 의견일 뿐 미국 정부가 백악관이나 국방부·국무부 차원에서 이에 동의하는 입장을 내지는 않았다”며 “북의 핵·미사일 고도화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과대평가하는 것도 경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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