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타란스키(알 파치노)가 디지털 인기배우 시몬(레이첼 로버츠)을 만든건가, 아니면 시몬이 타란스키를 인기감독으로 만든건가.
몰락한 영화감독 타란스키가 사이버 여배우 시몬을 앞세워 흥행대박을 터뜨리는 스토리를 담은 영화 ‘시몬’을 보고 나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가 뒤섞인 세상, 실제 현실보다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이 더 현실감을 주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깊은 여운을 준다.
영화는 자칭 천재감독인 타란스키가 거듭되는 흥행참패 끝에 영화판에서 내몰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좌절의 순간 한 엔지니어가 나타나 “당신의 여배우가 내 주머니에 있소”라고 말하며 사이버 여배우 프로그램을 타란스키에게 건넨다. 타란스키는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Simulation one’의 약어인 시몬(Simone)이란 이름의 사이버 여배우를 창조해 영화를 발표한다.
첫 작품인 ‘선라이즈 선셋’의 시사회장에서부터 시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시몬의 완벽한 외모와 연기를 보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각국의 신문과 방송들도 “시몬, 눈부신 스타 탄생”이란 보도로 슈퍼스타의 출현을 세상에 알린다.
컴퓨터로 정교하게 합성된 시몬의 외모는 흠잡을 데가 없다. “마릴린 먼로보다 더 관능적이고, 오드리 햅번 못지않게 청순하며, 우아함은 잉그리드 버그만을 능가할 정도”라는 찬사가 이어진다.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시선은 신예 스타 시몬에 쏠린다. 마침내 만년 삼류 감독이 대박 감독으로 거듭난다. 타란스키는 감격에 겨워 시몬과의 둘 만의 공간인 작업실에서 외친다. “시몬, 디지털시대가 도래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야!” 이에 대한 시몬의 답은 “난 현실의 죽음”.
현실의 죽음? 일견 타당한 말이긴 하다. 사이버 여배우 시몬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곧바로 현실 여배우들의 퇴조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영화 밖 실제 세상에서도 ‘현실’엔 중대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무엇보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비즈니스의 급성장에 대한 전자업계의 기대가 크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올해 1,370만대의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헤드셋 출하량이 연평균 56.1%의 고성장을 유지해 2021년에는 8,120만대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삼성기어VR, 구글 데이드림 같은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모바일 가상현실 헤드셋이 시장을 선점한 가운데 마이크로소프트와 파트너들이윈도우 MR(혼합현실) 헤드셋을 곧 출시해 공세를 강화할 태세다.
애플은 증강현실이 스마트폰 너머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핵심기술로 보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디지털 세계로 완벽한 몰입감을 제공하는 가상현실에 비해 현실 세계에 디지털 세계를 겹쳐 투영하는 증강현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상현실을 넘어서는 거대한 규모의 시장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애플 CEO 팀 쿡의 판단이다. IDC는 증강현실 시장이 2021년 300억달러로 가상현실 시장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영화 ‘시몬’은 현실 세계에 디지털 세계가 겹쳐 투영되는 모양새라 가상현실 보다는 증강현실 쪽에 가까워 보인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업계의 기대는 크지만, 그 못지 않게 현실감각의 상실 등 이로 인한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우려도 상당하다.
영화 ‘시몬’를 봐도 그런 우려에 수긍이 간다. 실체조차 없는 가상의 존재 시몬에 대한 대중의 열광, 언론의 열띤 취재경쟁 등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허구를 만들어내며 자책하는 타란스키의 모습 또한 그렇다. 출세욕에 병든 타란스키는 자책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상 속이기를 멈추지 못한다. 방송엔 사전 제작된 시몬의 인터뷰로 대응하고, 신문과 잡지엔 서면 인터뷰를 내보내 시몬의 허상을 부풀린다. 그래도 시몬에 대한 세상의 의혹이 끊이지 않자 타란스키는 시몬을 가수로 데뷔시켜 대규모 공연까지 갖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 명을 속이기보다 10만명을 속이기가 쉽지”. 그의 입가엔 씁쓸한 웃음이 번진다.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hnsj@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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