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거리에서 아랍식 문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맹 퇴치를 위해 1920년대에 읽기 쉬운 라틴식 철자를 도입한 결과다. 교육률을 높이려 난해한 조상의 글을 버려야 했던 터키에 비하면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한글을 물려받은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릇이 훌륭해도 담긴 음식이 미흡하다면 의미가 퇴색된다. 우리글이 담아내는 우리말은 정작 국내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 정부 보도자료에서마저도 우리말은 외면받거나 변질돼 쓰이기 일쑤다. 특히 금융위원회·과학기술정보통신부·외교부처럼 전문적인 분야를 주로 다루는 부처일수록 이런 상황이 자주 목격된다. ‘P2P대출을 통해 부동산PF상품에 투자시, 리스크 요인을 반드시 점검하세요’. 지난달 21일 금융위가 내놓은 보도자료다. 가뜩이나 어려운 금융 분야인데 핵심 용어마저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해 대중의 이해도를 더 낮추고 있다. 우리말 지킴이의 최일선에 서야 할 문화체육관광부조차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부처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자료 제목은 ‘한글 창의 아이디어 공모전 수상작 발표’였다. 한글 행사명에 버젓이 ‘아이디어’라는 외국어를 쓰고 있다. 그보다 하루 전에는 ‘스포츠산업 잡페어’라는 제목으로 행사를 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한글날을 맞아 페이스북 계정에 “SNS시대에서 한글의 위대함이 더욱 빛납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SNS’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라고 쓰거나 최소한 괄호 안에 우리말을 병행해 표기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한글날에 부끄러운 우리말 퇴조 시대의 한 단면이다.
민간 분야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가 최근 내놓은 갤럭시노트8 스마트폰의 설명 내용에서는 ‘최대화면 인피니티 디스플레이’ ‘색상 미드나잇블랙’ ‘강력한 퍼포먼스’처럼 쓸데없이 어려운 외국어 설명이 남발됐다. KT의 통신요금제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Y틴요금제’ ‘지니팩’ 같은 외계어 천지다. 전자·통신뿐 아니라 자동차·금융·유통 업종 같은 또 다른 민생 밀접 업종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러다가는 먼 미래에 한글이 외국어 발음을 읽기 위한 이두 문자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극단적 걱정도 든다.
외국어 유입은 국제화에 이은 전 세계적 통신망 연결로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반면 ‘콘텐츠’ ‘플랫폼’처럼 유행하는 외국어에 대응할 정도로 대중화된 우리말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당국과 학계의 외국어 대응을 위한 한국말 개발 속도와 폭이 너무 더디고 좁은 탓이다. 국립국어원 등 관계 당국, 학계의 한정된 인력과 예산만으로 외국어 범람에 대응하기 어렵다면 첨단기술과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보자. 거대자료(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대중의 사용 빈도나 학문적·산업적 중요도가 높은 외국어 단어들부터 추려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추려진 외국어를 중심으로 우리말 개발에 나서되 몇몇 학자나 전문가가 아니라 누리망(인터넷) 등을 통한 여론조사를 활용해 최종 개발 단어의 후보군과 선호도를 조사하는 공모방식을 제안해본다./newsroo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