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자에게 가장 난감한 계절은 매년 11~12월이다. 10월은 단풍이 있어 찬란하고 1월은 눈이 내려 볼거리가 풍성하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단풍도 눈도 없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12월은 겨울의 초입이지만 요 몇년 새 다니면서 눈 구경을 한 적은 거의 없다. 눈은 항상 1월의 진객(珍客)이었다. 그런데 요즘 무슨 공덕을 쌓았는지 12월 취재길에 잇따라 눈이 내렸다. 양이 적은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감지덕지하면서 덕유산으로 향했다.
‘무주’ 하면 ‘구천동’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래서 잡은 첫 번째 목적지가 구천동이다. 구천동에는 1경부터 33경까지 무수한 풍경이 펼쳐진다. 동행한 정이환 문화관광해설사는 “구천동 33경이 펼쳐진 거리는 30여㎞로 모두 섭렵하려면 이틀은 잡아야 한다”며 “해발 300~400m 사이에 있어 산행이 힘들지는 않다”고 말했다.
무주는 왜란·호란과 관련한 설화가 유독 많다. 구천동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산다고 해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고 원나라 황제가 옥새를 분실했는데 이곳에 사는 선비가 찾아준 대가로 황제가 내려준 이름이라는 신빙성 없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호란과 왜란을 거치면서 난민 9,000명이 숨어들어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가장 유력하다.
덕유산도 임진왜란 전에는 광여산으로 불렸다. 그런데 왜군이 산속으로 숨어든 우리 백성을 공격하러 올 때마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 백성들이 목숨을 보전한 덕에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는 의미로 ‘덕유산(德裕山)’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정 해설사의 입담은 에스컬레이터 같았다.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산길을 힘들지 않게 올라 우리는 어느새 구천동 33경 중 경치가 파회와 쌍벽을 이룬다는 18경 인월담에 도착해 있었다. 인월담은 숲이 빽빽한 구천동 계곡에서 유일하게 트인 하늘과 덕유산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월담을 둘러보는 동안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눈발에 가려 액정상으로는 전경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발길이 미친 곳은 비파담이다. 19경 비파담은 인월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비파담은 암반 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여러 갈래의 폭포를 이뤄 떨어지며 생긴 못으로 모양이 비파와 닮은꼴이다. 거세지는 눈보라를 피해 일단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오니 파랗게 갠 하늘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33경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파회였는데 도착하자 다시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무주 구천동 제11경인 파회는 연재(淵齊) 송병선이 이름을 붙인 곳으로 소(沼)의 물이 쏟아지며 부서져 물보라를 일으키다가 바위에 부딪혀 맴돈 후 그 사이로 흘러들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문화재청에서 명승 제56호로 지정됐다.
취재에 앞서 들른 군청에서 김영광 관광육성담당은 “무주는 반딧불이축제가 열리는 8월이 최고”라고 자랑했고 기자도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8월은 아직 멀었다. 주홍규 관광과장은 “무주의 아이콘 태권도원도 한 번 들러보라”고 했다. 그 말이 생각나 새로운 랜드마크를 향해 차를 돌렸다. 태권도원의 뒷산은 이름이 백운산인데 ‘흰옷 입은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고 해 붙은 이름이라니 앞날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력에 소름이 돋았다.
태권도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태권도 경기장인데 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70만평의 부지에 5,000억원을 투입해 조성한 공간이다. ‘태권도의 으뜸(元)’이라는 의미의 태권도원은 가상현실(VR)로 만든 가상체험관, 숙소, 공연장 등이 있어 세계 태권도의 본산이라고 할 만하다. 태권도원 안에 있는 태권도박물관에는 1~3전시실이 있다. 1전시실에는 태권도의 역사 및 성장 과정 등과 관련한 자료가 전시돼 있고 2전시실은 기술과 정신에 관련된 콘텐츠를 3차원(3D) 애니메이션 등으로 기록해놓았다. 김진흥 태권도원 주임은 “3전시실은 명인들의 자료를 모아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1482.
무주의 특산인 머루로 만든 와인을 저장·판매하고 있는 머루와인동굴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동굴 길이가 270m에 달하며 연중 13~17도로 유지되는 동굴 끝에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카페와 족욕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와인은 750㎖ 한 병에 2만원으로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글·사진(무주)=우현석객원기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