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보수정권 집권 기간 중 끊어졌던 남북 대화 창구가 아직도 복원되지를 못했어요. 서로 긴급히 대화할 핫라인마저 없으니 하다못해 휴전선 일대에서 우발적 사고가 나도 북측이 오인해 대응사격을 하고 국지적 충돌로 이어질 수가 있어요.”
한 군 당국자가 지난해 말 사석에서 기자에게 던진 우려다. 잘못 쏜 오발탄 한 발로도 한껏 고조된 한반도 안보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닫힌 대북 채널을 최소한이나마 열어보려고 군사회담 재개 등을 제안했지만 8개월이 넘도록 북측에서는 찬바람만 불어왔다. 2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오는 9일 남북당국 간 고위급회담을 열자고 북한에 공개적으로 제안한 것도 이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표면적으로는 전날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내비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에 즉각 호응한 조치이지만 단순히 스포츠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단발성 대화가 아니라 지속적인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당장 가장 기초적인 남북 간 판문점 핫라인 복구부터 이뤄져야 한다.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에 화답하기 위해 이날 오전 판문점 채널을 통해 북측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따라 조 장관은 오후 기자회견에서 “남북당국 회담 개최와 관련, 판문점 채널이 조속히 정상화돼야 한다”고 북측에 역설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나 미국·중국·러시아 등의 채널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북한과 접촉을 시도해왔으나 이 같은 우회적 시도로 평창올림픽 문제를 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절차적으로도 적합하지 않다는 게 청와대와 정부의 판단이다. 따라서 다소 투박하고 초보적인 수준이더라도 판문점을 통한 대북 담판을 벌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 회담이 성사된다면 최우선 의제는 당연히 평창올림픽이다. 북측의 대표단 구성과 우리 측의 의전, 해당 기간 중 북측의 군사적 도발 자제와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가뭄 속 단비처럼 잡게 된 기회인 만큼 스포츠 교류 이외의 다양한 양국 교류 및 안보현안이 추가적인 안건으로 다뤄질 수 있다. 조 장관도 이날 기자들의 질문에 “남북 대화가 상당히 오랜 기간 단절됐었고 북측도 어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한 만큼 당국이 서로 마주 앉게 된다면 여러 가지 상호 관심사항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9일이 아닌 다른 시기나 다른 형식·장소로 북한이 역제안해오더라도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회담이 열리더라도 북한이 어느 정도의 반대급부를 요구하느냐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이 ‘평창 청구서’를 들이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측은 최소한 평창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개최 기간까지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을 이미 공개적으로 천명한 상태다. 반면 북측은 아예 한미훈련 축소나 무기한 연기,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인정 등 보다 무리한 요구를 해올 가능성도 있다. 혹은 국제 제재 국면을 피하기 위해 무리한 협조를 우리 측에 요청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한미동맹이 훼손될 우려가 있고 국제적으로도 우리 정부의 신뢰도가 추락하게 돼 향후 북한이 군사 도발을 재개할 경우 대북 제재와 압박을 위한 공조망에 구멍에 뚫리게 된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북한은 또 다른 대접을 요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핵을 하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내다봤다.
우리 정부도 이 같은 국민적 우려를 인식해 북한의 무리한 요구는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조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에서, 그런 범위 내에서 저희가 회담을 잘 준비하고 추진해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차원으로 풀이된다. 미국 국무부 역시 김 위원장의 신년사와 관련해 “북한에 대한 일치된 대응을 위해 한국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가 보도했다. /민병권·김희원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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