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시간) 오후 디트로이트 다운타운 중심에 있는 마티우스 공원은 눈이 내리는 영하 15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 100여명이 북적이며 활기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스케이트장 맞은편의 유명 햄버거 체인점 쉐이크쉑버거에서 외식을 즐기던 현지 주민인 헬렌 제이슨씨는 “1~2년 전까지도 평일 오후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은 텅 비어 음습하고 위험한 곳이었다”고 회상하며 “지금은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고 쇼핑하기 위해 자주 우드워드까지 나오곤 한다”고 말했다.
쇠락한 미국의 제조업 지역을 일컫는 ‘러스트벨트’의 심장으로 2013년 7월 180억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했던 디트로이트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1년 만에 미 중북부의 맹주로 부상하기 위한 발돋움을 시작했다. 경기가 추락하면서 실업률이 20% 가까이 치솟고 강도·살인 등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슬럼화하던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다. 지난 3년간 디트로이트 시내에는 유명 호텔 30여곳이 문을 열고 다양한 음식점과 술집 100여곳이 새로 손님들을 모으면서 여행 전문지 론리플래닛은 올해 꼭 방문할 추천 도시 2위로 디트로이트를 꼽기도 했다.
상실감에 젖은 러스트벨트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트럼프 대통령이 1년 전 백악관에 입성한 후 제너럴모터스(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 ‘빅3’ 자동차 회사는 물론 도요타·BMW 등 외국계 회사의 공장 설립을 적극 독려한 가운데 나온 이 같은 변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듭되는 ‘자화자찬’을 뒷받침하는 모습임이 틀림없다.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 뉴욕증시의 다우존스지수는 30% 이상 급등했고 취임 당시 2%대였던 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대로 올라섰다. 감세정책을 비롯한 ‘당근’과 협박을 방불케 하는 ‘독촉’ 속에 해외로 나갔던 많은 미국 기업들은 본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서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쏟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디트로이트 최대 전시장인 코보센터에서 만난 오거스타 쿠퍼씨는“혹시 퀴큰론(quicken loan)을 아느냐”고 되물으며 “디트로이트를 다시 살린 것은 정치인이 아닌 기업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코보센터로 이동하며 만난 우버 운전사도 “디트로이트를 살리는 데 누가 가장 기여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댄 길버트 퀴큰론 회장”이라고 단언했다. 기자가 모르는 기업인의 이름에 당혹스러워하자 쿠퍼씨는 “모기지 금융회사인 퀴큰론이 본사를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으로 옮기고 텅 빈 빌딩 100여채를 사들이는 등 도심 재건을 이끌면서 다른 기업들의 투자가 살아났다”고 설명했다. 디트로이트가 고향인 길버트 회장이 2010년 이미 경제가 침몰하던 디트로이트로 본사와 1,700여명의 직원들을 옮기고 지속적으로 투자를 확대해 현재는 1만7,000여명의 퀴큰론 임직원들이 다운타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종로와 같은 디트로이트 우드워드대로에 지난해 개통한 지상전철 ‘Q라인’ 역시 퀴큰론의 투자를 받아 건설됐다. 추연정 KOTRA 디트로이트무역관 과장은 “수십년간 다운타운에 인프라 투자가 전무하다시피 해 Q라인 노선이 길지는 않지만 디트로이트 시민들의 자부심이 됐다”고 전했다.
반면 러스트벨트의 지지 기반에 힘입어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의 인기는 높지 않다고 현지 주민들은 귀띔했다. 한국계로 디트로이트에서 20년간 여행사를 운영해온 브라이언 김 사장은 “지난 대선에서 미시간주 등 러스트벨트의 많은 백인들이 워싱턴 주류정치에 대한 배반감 속에 트럼프를 선택했지만 트럼프 개인의 인기가 높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시민들은 디트로이트 경제를 살린 것이 트럼프 정부가 아닌 기업과 기업인들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자동차 빅3 ’의 존재감도 크다. 실제 ‘모터시티’로 불리는 디트로이트가 옛 영광을 재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실업률이 4~5%로 떨어지고 연간 2,500억달러 이상의 총생산을 기록하는 것은 GM·포드·크라이슬러의 생산량이 늘면서 투자도 함께 증가한 것이 버팀목이었다.
여기에 디트로이트 소매금융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JP모건체이스가 2014년부터 1억5,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해 도시 재건사업들에 자본 및 인력을 투입하면서 제조업과 건설·금융이 삼두마차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한때 유리창 깨진 고층빌딩이 있던 곳을 한겨울에도 활력이 넘치는 랜드마크로 변모시켰다. 미드타운에서 자동차딜러숍을 운영하는 제이미 맥스 사장은 “디트로이트가 ‘지금 최고’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점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자동차뿐 아니라 금융·관광 등 서비스업에서도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빅3’를 포함한 이들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된 배경에 트럼프의 ‘당근과 채찍’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말 트럼프 정부의 법인세 인하 등 감세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크라이슬러는 11일 미시간주 공장에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한편 멕시코에 있는 픽업트럭 생산라인을 2020년까지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포드와 GM도 지난해 각각 10억달러와 12억달러의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본격 이행에 들어가면서 수백개 협력업체들의 투자도 덩달아 이 지역에 몰리고 있다. 지난해 LG전자가 미시간에 2,500만달러를 투자해 전기차부품 공장을 짓기로 한 것도 GM이 전기차 투자를 늘리면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디트로이트=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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