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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7년 토굴 생활'서 '시황제'로… 시진핑이 불안한 이유는

"명문가 자제서 반역자 아들로" 7년간 토굴 생활

푸젠성·허베이성 등 지방 돌며 친위대 '시좌쥔' 구축

'돌싱남'임에도 국민가수 펑리위안과 결혼에 골인

공청단-상하이방 계파 싸움 어부지리로 국가주석직

보시라이·저우융캉 등 정적 쳐내며 이빨 드러내

개헌 통해 집단지도체제 해체하고 장기집권 노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전기는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중국 베이징의 한 서점에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어록을 담은 서적 ‘시진핑 국가통치를 말하다’(習近平 談治國理政)가 진열돼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날 19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9기 3중전회)를 통해 시 주석의 사상을 집중 강조하고 당과 국가기구 개혁을 추진키로 했다. /AFP연합뉴스




‘국부’인 마오쩌둥과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시진핑 국가주석.

그의 이름은 베이징의 옛 이름 ‘베이핑(北平)’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에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는 건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명예를 모두 갖췄다는 ‘슈퍼 금수저’를 말하죠.

시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은 13세 때부터 중국 혁명에 뛰어들어 22세 때에는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후의 근거지를 제공했던 인물로 중국 근현대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시중쉰 전 중국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의 첫 아들로 태어난 시진핑(왼쪽)/사진제공=위키피디아


◇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정치 명문가의 자제로 꽃길만 걸을 줄 알았지만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일입니다.

시진핑은 아버지가 1962년 ‘류즈단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시중쉰이 모셨던 옛 상사 류즈단의 삶을 소설로 묶는 과정에서 한때 반역죄로 몰렸던 가오캉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소설에 등장했죠.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시중쉰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마오쩌둥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 시진핑의 나이 9살 때였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시진핑의 삶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게 됐죠. 비판대에 오른 아버지를 직접 공격해야 할 정도였죠.

젊은 날의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 주석이 동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위키피디아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중국 대륙을 휘감으면서 부자의 삶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시진핑은 홍위병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15살 때부터 7년간 ‘하방(下放)’을 택합니다. 하방은 지식인을 사상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보낸다는 뜻이지만 어린 시진핑의 생활은 강제 노역자와 다름없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생 나이인 시진핑이 산시(陝西)성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세 평 남짓한 토굴에서 살면서 하루에 50㎏씩 밀을 나르며 10리를 움직여야 했죠. 태자당이면서 10번이나 입당지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공산당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어린 시진핑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나는 황토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하방 생활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하곤 합니다. 최고권력자로 자리잡은 뒤 2015년 어릴 때 살았던 토굴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방 생활에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얻는 건 어려워도 잃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권력의 속성을 이때 깨우쳤기 때문이 아닐까요?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 펑리위안의 가수 활동 시절. 시진핑과 결혼할 당시 20대 초반이던 펑 여사는 인민해방군 가무단 소속 민족성악 가수이자 국민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EPA연합뉴스


◇측근과 사랑, 권력의 발판을 얻다

시진핑은 그를 눈여겨본 량자허현 서기의 추천으로 마침내 1974년 공산당에 입당하게 됩니다. 1975년에는 어렵사리 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칭화대학에 입학했지요. 시진핑은 한 회고문에서 “‘붙여주면 들어가고 아니면 그만두지’라는 생각으로 1, 2, 3지망을 모두 칭화대로 썼다”는 말을 했습니다. 1978년에는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아버지 시중쉰도 정치적으로 복권됐습니다. 16년 만에 시진핑의 앞날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 졸업 후 지방근무를 자청한 시진핑은 푸젠성, 허베이성, 저장성 등 중국 전역을 돌았습니다. 그는 지방 경험을 통해 중앙 무대에서 정치엘리트 계파들과 대항할 수 있는 측근들을 만드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는 ‘시자쥔’이라고 불리는 친위대입니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인기가 높은 퍼스트레이디이자 ‘정치적 동반자’ 펑리위안과의 만남도 이때 이뤄집니다.

펑리위안과 처음 만난 1986년. 시진핑은 3년간의 짧은 결혼생활 후 이혼의 아픔을 맛본 ‘돌싱남’이었습니다. 주영 중국대사를 지닌 외교관의 딸로 외국생활에 익숙했던 첫 부인 커링링은 지방에서의 생활을 무척 따분해했고 이런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 다툼도 잦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시진핑은 허베이성 정딩현으로, 커링링은 영국 유학을 떠나며 헤어졌습니다.

함께 해외 순방 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부인 펑리위안 여사/EPA연합뉴스


이때 펑리위안은 18세부터 인민해방군 가무단 소속으로 활약하며 이미 ‘국민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요. ‘재희망적전야상(在希望的田野上·희망의 들판에 서서)’을 부를 때마다 전국의 남성들이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습니다.

시진핑은 화려한 국민가수 펑리위안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요? 첫 만남에서 펑리위안은 시진핑이 외모를 중시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군복 바지 차림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진핑 역시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있었지요. 이 자리에서 시진핑은 펑리위안에게 창법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 속물적 질문이 아닌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는 태도에 펑리위안의 마음은 움직였고, 시진핑은 초혼인 펑리위안과 결혼에 골인합니다.



지방근무를 하던 시절의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사진제공=CNN


◇변방에서 권력의 중심으로

중앙 정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하던 시진핑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2007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가 비리로 상하이 서기직에서 낙마하자 그가 후임으로 발탁됐죠. 중국 경제도시 상하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그는 기회를 살려 단박에 스타 정치인으로 올라섰습니다. 10개월 뒤에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되며 권력의 중심으로 도약했습니다.

비록 중앙무대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시진핑이 ‘시황제’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시진핑이 속한 태자당 세력은 전 국가주석인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당시 국가주석인 후진타오가 이끄는 공청단에 비해 상대적인 파워가 적었거든요. 하지만 상하이방과 공청단이 후계자를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암투 속에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두 세력에 속하지 않으면서 적이 없었던 시진핑을 국가주석 후계자로 삼기로 공청단과 상하이방의 합의가 이뤄진 것입니다. 그는 2008년 부주석에 오르며 국가주석 자리를 예약했습니다.

2011년 중국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르기 전 중국 국가 부주석으로 태국 방문에 나선 시진핑이 차에 오르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호랑이든 파리든 다 때려잡겠다.’

사람 좋은 줄만 알았던 시진핑은 권력의 중앙에 들어서자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난 계기는 중국은 물론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보시라이 사건’입니다. 보시라이 당시 충칭시 서기는 시진핑과 같은 계파인 태자당 내에서 최대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조직범죄를 소탕하고 ‘마오쩌둥 따라 하기’ 등 극좌적 행태로 빈부격차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2011년 말 보시라이 아내의 사주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가 독살당한 일이 발생하고 이듬해 사건에 연루돼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시라이의 최측근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시진핑은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과 손잡고 이를 구실로 보시라이를 해임하고 사법처리를 주도했습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된 해인 2013년 진행된 1,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완전히 몰락해버렸지요.

또 중국 권력의 정점에 있는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보시라이의 정치적 후원자인 저우융캉 정치국 상무위원도 낙마시켰습니다. ‘부패 호랑이’라고 불렸던 저우융캉의 죄목도 아이러니하게 뇌물수수, 직권남용, 국가기밀 고의누설이었지요. 이어 쑨정차이, 링지화 등 자신의 앞날인 걸림돌이 될 고위 관료들도 차례로 같은 방법으로 날려버렸어요.

◇‘종신 국가주석’을 향한 질주

2기 임기가 시작된 지난해부터는 장기집권을 향한 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엘리트인 상하이방과 공청단을 견제하면서 친위대인 시자쥔들을 주요직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시진핑 사상’을 당헌에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이름이 오른 중국 지도자는 국부인 마오쩌둥과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밖에 없죠.

장기집권을 위한 마지막 작업으로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집단지도체제를 3일부터 열리고 있는 중국 최대 정치이벤트 양화(전인대와 정협)에서 깨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1982년 이후 중국 사회의 근간이 됐던 권력독점과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덩샤오핑은 만든 헌법에서 ‘국가 주석은 2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는 문구를 삭제하면, 그의 3연임을 막을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집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얼굴이 들어간 기념품이 ‘국부’ 마오쩌둥 기념품과 나란히 베이징의 한 가게에 걸려있다. /EPA연합뉴스


이는 단순히 ‘종신 국가주석’의 길을 열었다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3연임 제한’ 규정과 집단지도체제는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로 무려 2,000만명이 숙청, 기아 등으로 사망한 문화대혁명의 결과물입니다. 덩샤오핑 등 중국 지도부는 1인 독재는 반드시 국가적 재앙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얻었고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3연임 제한’ 규정 삭제가 지난 40년 개혁개방의 성과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역사적 퇴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화혁명의 희생자였던 시진핑이 그 때 당시로 국가 시스템을 후퇴시킨 셈이지요.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을 나누며 정치적 책임도 여러 계파가 나누어 가졌는데, 이제는 시진핑 홀로 실패의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나마 문화혁명 때는 최고 지도자의 판단 오류에 따른 파장이나 비극이 중국 내부로 한정됐습니다.

반면 현재 중국은 ‘중국몽’ ‘대국굴기’ ‘군사굴기’ 등을 내세우며 제국주의적 행태를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정책적 오류나 판단 잘못을 저지를 경우 전 세계가 후폭풍에 휩싸이게 된 셈이지요. 특히 한국, 동남아 등 주변부 국가들이 어떤 유탄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동시에 중국 내부를 보더라도 빈부격차, 도농간 격차, 환경오염, 소수민족의 저항, 공산당 독재의 비효율성, 한계에 이른 양적성장, 다른 정치 계파의 반발 등 지뢰밭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지금 시진핑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다지고 있고 ‘시황제’에 도전하는 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의 ‘중국몽’ 구상에 미국 등 서방의 반발이 커지고 중국 내부의 모순이 격화된 가운데 다른 정치세력의 반격이 시작될 경우 그 파장은 예측조차 힘듭니다. 자정 기능이나 견제 능력을 잃은 1인 독재란 항상 파국으로 끝나기 마련이지요. 전세계가 시진핑의 장기 집권 프로젝트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연유진·정혜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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