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평범한 소녀이자 노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던 1917년, 미국 뉴저지 주의 시계 공장에서는 시계 바늘에 야광 도료을 칠하던 소녀들이 있었다. 10대의 꽃다운 나이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야광 시계는 불티나게 팔렸다. 조그마한 손목시계에 도료를 칠해야 하는 만큼 붓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얇게 칠해야 했다. 소녀들은 입으로 붓을 모으고 도료를 찍어 시계 위에 덧칠했다.
이 도료의 정체는 라듐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가 발견한 이 물질은 초창기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라듐을 이용한 초콜릿, 라듐이 첨가된 생수 심지어 라듐이 첨가된 좌약도 있을 정도였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성질을 가진 라듐은 마치 오늘날 ‘은나노’, ‘미네랄’ 열풍처럼 신성시됐다. 소녀들 역시 ‘몸에 좋은 라듐’을 온몸에 바르며 ‘유령 놀이’를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빛나는 소녀들은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이 책은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이 소녀들의 투쟁기다. 라듐은 화학적으로 칼슘과 비슷하다. 칼슘은 인체의 뼈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라듐이 포함된 도료를 붓에 찍고 이 붓을 가늘게 만들기 위해 입으로 모으면서 자연스럽게 소녀들의 몸에는 라듐이 축적되게 된다. 인체에 흡입된 라듐은 소녀들의 뼈에 칼슘 대신 들어간다. 그리고 알파선을 비롯한 방사선을 방출한다. 초창기 라듐이 몸에 좋다는 믿음 역시 여기에 있었다. 혈액을 만드는 뼈에서 방사선이 나오니 적혈구 생성이 촉진된 것이다.
칼슘 대신 라듐이 축적된 뼈가 제 기능을 할 리 없었다. 소녀들은 이빨이 빠지고 턱이 괴사하는 등의 증세를 나타냈다. 이빨이 뽑히고 턱뼈가 빠지고 모든 뼈에 구멍이 생기고 무너져 흘러내렸다. 혈액을 만드는 골수가 망가져 하얀 피가 생성됐고 한 소녀는 한밤중 거울 속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을 마주하기도 했다. 뼈에 흡수된 라듐이 야광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그 소녀는 피부밑 빛나는 뼈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5명의 소녀는 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소녀들의 편을 드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정부는 기업편을 들었고 의사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왜곡되거나 은폐됐다. 회사 측에 고용된 의사들은 소녀들의 사망과 라듐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의사 자격이 없는 철학박사가 명의로 둔갑해 ‘라듐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소녀들을 돕던 마트랜드 박사는 소녀의 동료들 이름을 적었다. 훗날 ‘죽음의 명단’이라는 이름이 붙는 이 자료는 오싹할 정도로 정확했다. 박사는 도장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료를 찾았고 어김없이 망자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사망한 여성의 이름 옆에 붉은색으로 D라고 적었다. 죽음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데스(Death)의 준말이었다. 라듐의 반감기는 1,600년. 소녀들이 죽은 뒤에도 라듐은 그들의 뼈에서 끊임없이 방사선을 방출할 운명이었다. 박사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소녀의 유해를 묘에서 꺼내 X레이 필름 위에 올려놓았다. 선명하게 뼈의 이미지가 필름 위에 새겨졌다.
소송은 10년도 넘게 지난 1939년 소녀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많은 피해자들이 승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회사는 보상금을 줄이고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의로 재판을 지연했다. 지연된 재판이 재개된 5개월 뒤 증언의 기회가 마련됐지만 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절규는 어떤 면에서 현재진행형이다. 1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이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소녀들의 희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라듐 공장이 있던 일리노이 오타와에는 2011년 도장공의 동상이 세워졌다. 일리노이 주지사는 “라듐 걸스는 누구보다 높은 추앙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부정직한 회사와 냉담한 산업계, 그들을 멸시하는 법원과 의학계와 맞서 싸웠다”고 밝혔다. 1만9,800원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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