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보다 더 흰 구름바다에 쪽빛 하늘 조각이 떠 있다. 하늘 위 구름이 아니라 구름바다에 하늘 조각이다. 어느 것이 구름이요 어느 것이 하늘인지, 네가 나인지 내가 너인지, 아니 그런 구분마저 덧없게 만드는 신비로운 깨달음이 혼재한다. 그 사이를 가르며 지나는 한 척의 배(船) 같은 것이 있으니 광배(光背)라 한다. 광배는 부처 등 신성한 존재의 뒤를 감싸는 신비의 빛을 뜻한다. 본래 의미로는 광배가 부처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흐린 분홍빛이 오히려 인간의 살 색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림 속에서만은 신과 사람의 경계마저도 허물어지는 듯하다. 그림은 추상화가 전성우(1934~2018)의 1999년작 ‘청화만다라-광배’ 연작 중 47번 작품이다. 50년 이상 ‘만다라(曼茶羅)’라는 큰 주제 아래 자연주의와 신비주의를 넘나드는 작품세계를 펼쳐온 그의 별칭은 ‘만다라 화가’다.
‘만다라’의 어원은 진수를 뜻하는 ‘만다(manda)’에 소유를 나타내는 어미 ‘라(la)’를 붙인 합성어로 본질을 나타낸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성취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지금은 밀교적 수행법으로 더 알려져 있다. 보통 만다라 그림이라고 하면 복잡한 문양이 좌우상하 대칭적으로 반복되는 불화를 대표적으로 떠올리지만 전성우의 ‘만다라’는 스밈과 울림이 강조된 전혀 다른 화풍이다. 평생 ‘만다라’를 추구한 그는 작심하고 정리한 메모에 ‘불교의 진리는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理想)으로서, 만다라는 인류를 포함한 우주의 조화있는 진리의 표현’이라고 적었고 ‘만다라는 불교적 우주의 본질을 지향하며 그것은 모든 진리가 완성돼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의 지향’이라고 썼다. 작가는 1960년작 ‘진기(眞器)만다라’ 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만다라를 그렸고 자연, 시(詩), 노래, 진리, 고대, 동방, 전통, 꿈, 여행, 기쁨 등을 제목에 붙여 다채로운 정신성을 풀어냈다.
평생을 두고 ‘만다라’를 그린 전성우 화백이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50대 중반인 1990년 이후 15년 이상을 매진한 것이 ‘청화만다라’ 연작이었다. 그림을 본 원로시인 이흥우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 간다// 하얀/ 조선 사기/ 자기에/ 쪽빛/ 핀다.// 청화만다라/피다…”라는 시를 읊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친숙함을 주는 색감은 청화백자, 그러니까 우윳빛 흰 항아리에 짙푸른 색으로 그림을 그린 그 청화백자에서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스스로를 백의민족이라 불렀듯이 흰색은 한민족에게 색의 시작이며 색의 종결일 수 있다. 흔히 한국미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조선백자라 한다. 백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며 백자 위에 최고, 최상의 진실을 담은 것이 곧 청화백자라고 나는 믿는다. 청화 만다라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도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작가들은 나이가 들수록 어릴 적 미감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전성우의 후기작인 ‘청화만다라’는 그의 예술적 바탕을 더듬게 한다. 화가 전성우를 달리 부르는 이름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아들’이며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낮춰 간송의 유지를 받든 ‘창고지기’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의 아들로서 그는 5살이던 1938년에 아버지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운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국보 1호’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인 무가지보(無價之寶)의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과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비롯해 철(鐵) 성분으로 짙붉은 문양을 넣고 청색으로 그림을 그린 국보 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등의 귀한 유물을 곁에서 지켜보고 끝까지 지켜온 그다.
보성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한 전성우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4월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그 북새통 가운데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 들어간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전후(戰後) 미국은 추상표현주의 화풍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물감을 뿌리며 난리치듯 그림을 그린 잭슨 폴록이나 모호하고 아스라한 색덩어리로 명상적인 화면을 구성한 마크 로스코 등이 대표적이다. 타국에서 더욱 동양성과 한국적인 것을 탐구했을 전성우는 외부의 자극과 내적 충동을 합쳐 독자적인 그만의 화풍을 이뤘다. 미술사학자인 정영목 서울대 교수는 “전성우는 자연과 세계를 바라다보는 신비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것의 밝고 긍정적인 측면을 동양적 사고와 전통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추상으로 이행하고 있었다”면서 좀 더 동양적인 추상회화를 이뤄낸 작가를 ‘낭만주의자’로 평했다. 우리 것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던 전성우는 1959년 밀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국미술사와 함께 서예의 중요성, 동서양 미술간의 영향 관계 등을 강의했다. 그해 여름에는 시애틀 근처 베르논 산에서 배를 타고 40분 거리인 인 무인도 ‘구에마스 섬’에 홀로 들어가 3개월간 작업했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고되고 외롭지만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게 한 섬 생활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만다라’ 시리즈다. 이듬해 그는 미국 휘트니미술관이 35세 미만의 신진작가 30명을 선발하는 ‘영 아메리카 60’이라는 기획전에 초대됐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으로는 백남준보다도 앞선 ‘최초’였다. 휘트니미술관은 그의 1961년작 ‘자연만다라 #9’를 소장하고 있다. 1961년에는 당시 미국 굴지의 화랑인 ‘볼스 갤러리’ 전속작가가 돼 개인전을 열었다.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날아든 비보에 그는 오클랜드의 산속으로 들어가 두 달 동안 울면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 간송이 5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태평양을 넘나드는 게 요즘처럼 쉽지 않던 시절인지라 부친은 자신의 죽음을 아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큰 누이는 장례식을 치르고도 석 달이 지나서야 편지로 사실을 전했다. 이후 전성우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65년에 영구 귀국을 택했다.
한국으로 온 전성우의 삶은 세 갈래로 나뉜다.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고 가업인 학교법인 동성학원을 물려받아 보성고등학교 교장과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의 길이 있었다. 그 때 발굴한 보석이 개념미술가로 유명한 안규철 한국예술종합대학 미술원 교수이고,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김덕기 등이다. 또 하나는 간송미술관을 이끄는 관장으로서 부친의 유훈을 받든 일이다. 일제 치하의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꼭꼭 숨겨두고 학자에게만 연구용으로 보여줬으나 보화각을 물려받은 전성우는 문화재의 가치를 제대로 계승하고자 1년에 두 번씩 무료 공개전시를 시도했다. 아버지가 지켜낸 보물을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 것. 매년 봄가을이면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들어가려는 긴 줄이 언덕 아래 큰 길까지 이어진다는 얘기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닐 정도였다. 지난 2013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출범하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정기적으로 기획전을 열어 전통의 현대화를 모색하게 한 것 또한 그였다.
그리고 또 하나, 화가의 길이다. 그의 귀국전인 1965년의 전시는 화제를 일으켰고 당시 한국화단을 이끄는 추상화가 순위조사에서는 김환기를 앞설 정도였다. 1960년대 그의 그림을 본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엎질러진 보석상자”라는 비유로 “운염의 번지는 맛, 유연하고 은근한 감각적 실현, 그러면서도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작가의 태도”를 이야기했다. 그 시기 작품 중 하나인 1965년작 ‘공간만다라’는 작가가 개인적으로도 무척 애착 가진 작품이었다. 머나먼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막 태어나는 빛의 꿈틀거림이 수천 광년을 지나 우리 눈에 닿은 듯 아련하다. 상자에서 쏟아진 보석이라는 비유가 참으로 적절한 1966년작 ‘자연 만다라’는 어두운 배경 속에 모습을 드러낸 색들이 태양과 달, 양과 음, 서양과 동양 같은 대비되는 존재를 암시한다. 보통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림 그리는 것과 달리 전성우는 화판을 눕혀놓고 그리며 번짐과 스밈의 효과를 구현했고 “아름다움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며 “나에게 있어서 붓질이란 마음 속의 때를 벗겨내는 행위”임을 강조했다.
‘만다라’를 화두로 광배와 해탈 등을 그림으로 구현한 전성우지만 정작 그는 불교 신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그림은 진정으로 세상 모두를 품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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