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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62>황염수 '장미']강인한 검정 테두리 속 꿈틀대는 생명력...열정·순결·사랑을 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장미소재로 40년 작업

높은 채도로 표현된 독특한 색채감각 눈길

모던아트協 활동땐 추상적 화풍 보였지만

이후 전업화가로 지내며 '작은 그림' 고집

황염수 ‘장미’ 1975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사진제공=가람화랑




장미가 지천이다. 반포대교 남단에 조성된 화단부터 용산구청을 지나 돌아가는 삼각지에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북촌, 서촌의 담장 있는 집이면 너나없이, 아파트는 곱게 꾸며둔 화단 구석구석 빨간 장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흔해서 싫다거나 많아서 지겹다는 얘기가 아니다. ‘꽃 중의 여왕’인 장미가 친근하게 곳곳에 피었으니 반갑고 기뻐 스쳐지날 동네 담벼락 한 번 더 돌아보는 게 흐뭇해서 하는 소리다.

그렇게 핀 장미를 한 송이씩 꺾어 담은 듯하다. 빨간장미와 흰장미 사이로 분홍장미와 노란장미가 다투듯 얼굴을 내민다. 꽃송이를 꽂아둔 백자 항아리에까지 철화(산화철로 그려 진붉은 갈색을 띰) 문양으로 그려넣은 장미가 만발하다. ‘장미의 화가’라 불린 황염수(1919~2008)의 1975년작 ‘장미’다. 장미는 다발로, 무더기로 여럿이 뒤섞여있지만 화가는 굵고 짙은 색 테두리를 꽃마다 둘러 각각이 고유한 표정을 갖게 했다. 감출 줄 모르는 열정의 사랑부터 순결한 첫사랑과 당당한 질투, 든든한 우정과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색색의 장미 사이를 넘나든다.

화가가 꽃을, 특히 장미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꽃이라는 소재에 매달렸으니 영면에 드는 날까지 거의 40년을 장미만 파고들었다. 꽃을 찾는 일은 벌처럼 부지런했다. 어스름 새벽에 남대문 꽃시장을 찾아가 장미를 직접 보고 골라서 그림을 그렸다. 마음에 드는 장미라도 반드시 피기 전의 것이라야 그의 작업실까지 따라올 수 있었다. 대상을 눈앞에 실제로 두고 현장에서 느낀 그 흥분감을 온몸으로 그리고자 했기에 살아있는 장미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렸다. “꽃병에 꽂고 피기까지의 과정을 응시하면서 구상을 하고 그 움직임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하는 그는 종종 “꽃의 움직임”을 이야기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 꿈틀대는 생명력이 굵고 강인한 검정 테두리가 됐다.

황염수 ‘장미’ /사진제공=서울옥션


생전의 작가는 ‘왜 장미를 그리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 정작 대답은 싱겁다. “마음대로 바꾸기 좋은 대상”이라 장미를 그린다고 했다.

“나는 장미를 그대로는 그리지 않는다. 그대로 그리려 하면 자꾸 다른 꽃들이 튀어나온다. 내 그림의 목적은 장미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장미가 내 마음 속에 던지는 어떤 ‘부딪힘’이다. 미술이 해야 할 역할은 현실의 장미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을 그려내는 일일 것이다.”

꽃을 그리지만 ‘꽃 그림 화가’로 불리는 데는 질색했다. 따지자면 그의 본색은 ‘영도’ ‘도봉산’ 등 직접 사생하고 그린 풍경화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어떤 것을 느끼게 했느냐였다. “비록 장미를 그렸어도 보는 사람이 장미임을 깨닫기 전에 ‘좋다’는 느낌부터 먼저 받았으면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염수 ‘장미’ 1977년작. /사진제공=가람화랑




하기야 인류와 평생을 함께해 온 장미는 동서고금의 화가들이 두루 그린 소재였다.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은 과일이 있는 정물 곁에 장미를 포함한 화병을 종종 두고 함께 그렸다. 세잔의 장미는 그의 ‘산’과 ‘사과’만큼이나 견고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장미는 그가 그린 여체의 풍만함 못지않게 눈부시게 풍요롭다. 사랑받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꽃 그림을 좋아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이글거리는 ‘해바라기’나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푸른색 ‘붓꽃’도 강렬하지만 말년에 그린 ‘아몬드나무’와 더불어 ‘장미가 든 꽃병’은 아름다움을 초월한 숭고함을 내뿜는다. 2004년 5월 뉴욕 소더비에서 1억 417만달러에 낙찰돼 당시 세계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은 푸른 옷의 소년 못지않게 그가 머리에 쓴 장미 화관과 뒷벽을 장식한 장미가 눈길을 끈다. 최근 크리스티 뉴욕이 실시한 록펠러 자선경매에 나와 1,241억원에 낙찰된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 역시 청회색을 배경으로 선 깡마른 앳된 소녀의 건조한 표정과 붉은 꽃이 묘한 대구를 이룬다. 이들 두 작품은 1905년에 그려진 것으로 2년이 채 안되는 피카소의 ‘장밋빛시대(Rose Period·장미시대)’의 대표작이다. 클로드 모네의 ‘장미정원’이든, 에두아르 마네의 ‘장미’든, 앙리 마티스의 화려한 방을 채운 꽃까지 화가에게 장미는 지천에 널려 언제든 보고 그릴 수 있는 소재임에도 본질에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존재였다.

황염수 ‘장미’ /사진제공=가람화랑


황염수는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의 이중섭(1916~1956)과 절친했기 때문에 또래인 1917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족에 따르면 1919년 이후에 태어났으나 “호적이 잘못됐다”고 들었다 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고 전국 규모의 미술대회에서 두 번이나 입선해 화가의 꿈이 움텄다. 그 시절 서양화를 배울 방법은 독학 아니면 유학이었으니 처음에는 일본 우에노 미술학교 응시했는데 근처 미술관에 부르델 조각을 보러 달려가는 바람에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부득이 들어가게 된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는 자유로운 학풍이 오히려 황염수의 천성과 더 잘 맞아 5년 유학기간에 한 번도 방학 때 고향에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영영 떠나게 됐지만 피난시절 부산에서 만난 화가 남경숙이 평생의 짝이 됐다. 남경숙 여사는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재원으로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던 실력파 작가였지만 결혼 후에는 황염수와 같은 작업실을 쓰며 남편의 활동에 더 힘을 실어줬다. 황염수는 이중섭과 동향의 또래로 아주 친했고 양쪽 부부간에도 왕래가 잦았다. 이중섭은 황염수 부부의 결혼 선물로 비둘기 그림을 그려줬고 남 여사는 지금도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

황염수 ‘장미’ /사진제공=서울옥션


황염수는 1957년 모던아트협회 창립 멤버로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봄·가을 기획전에 참여했다. 유영국·박고석·한묵·이규상과 함께 협회를 설립했고 이후 천경자·문신 등이 합류했다. 명성과 개성이 두드러지는 화가들이었지만 정치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예술에 대한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공통분모로 모인 이들이었다. 당시 황염수의 화풍은 추상적 경향을 보였다. 모던아트협회 이후 황염수는 그 어떤 협회에도 속하지 않고 교수나 강사 자리 조차 마다한 채 오로지 ‘전업화가’로 살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독창적 화풍이나 근현대 화단에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대표적 공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는 황염수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미술관 학예실에서도 “없을 리가 없는데?”라며 놀라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현대미술에 기여한 바가 크나 작품이 자그마한 소품 위주라 대작 중심인 여타 미술관 소장품으로 같이 전시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대작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소장품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면서 “특히 ‘장미’ 등의 그림으로 인기작가였고 다작하지 않고 과작하는 편이었기에 미술관에 작품이 들어올 경황이 없었다”고 되짚었다. 미군과 외국인을 상대로 선물용 그림을 그려준 박수근이나 골방 같은 작은 화실에서 웅크리고 그림 그린 장욱진처럼 끝끝내 ‘작은 그림’을 고집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 평론가는 “문인화를 그리던 선비적 사고가 자기과시적인 큰 그림보다는 소박하고 소탈한 작은 그림에 천착하게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국큐레이터협회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박래경은 ‘황염수와 그의 그림세계’라는 평론 글에서 소재나 조형성 못지않은 작가의 독특한 색채감각에 주목했다. 장미와 꽃들은 눈이 부시기라도 한 듯 유별나게 높은 채도로 표현됐다. 실재의 꽃보다 작가의 마음에 다가온 꽃을 그렸기에 그럴 것이리라. 작가 생전에 박래경 평론가는 “대상을 앞에 두고 철저하게 그리면서 꽃의 고유색이 아닌 그 강렬한 색채대비는 대체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고 황염수는 “어머니가 과거 평양에서 비단염색 공장을 크게 하셨고 그걸 보고 자라서 아마 그럴 것”이라며 눙치듯 답했다고 한다. 꽃을 다시 보자. 그 고운 빛깔과 새초롬한 모양을 눈으로 더듬고 다가가 향도 음미해 보자. 화가는 그 꽃이 지는 게 안타까워 송이송이 그림에 가둬 넣었다. 그림 밖 꽃은 이내 지고 만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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